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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씀 Aug 18. 2022

수능 한 달 전, 부모님이 결혼을 했다.

늘 노력해야 하는 가족의 이야기

10년도 훨씬 지난 그날은 덥지도 춥지도 않은 선선한 토요일이었다. 나는 넷째 삼촌 차 뒷좌석에서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을 가던 중, 삼촌이 조심스럽고 따뜻하게 말했다.



결혼식장에서...
엄마, 아빠한테 아는 척은 하지 마~



엄마, 아빠의 결혼식에 가는 길이었다. 내 나이 19살에 엄마, 아빠의 결혼식이라니… 사실 결혼식도 결혼식이지만, 수능이 꼬박 한 달 남은 시기였다. 결혼식을 가야 하나 고민했지만, 하루 공부한다고 성적이 팍 오르겠나~하루 공부 안 한다고 내가 갈 대학을 못 가겠냐는 마음으로, 부모님 결혼식에 가겠다고 했다. 밤에 더 공부하면 될 일이겠지 해서.


결혼식장은 복작복작했다. 내 부모님 결혼식이지만, 내가 모르는 사람들로 가득 찬 결혼식장. 이곳저곳 둘러보면서도 엄마가 있는 신부대기실과 아빠 근처에는 갈 용기가 없었다. 그냥 결혼식장 맨 끝에서 지켜만 보았다. 뷔페에서도 엄마, 아빠를 만날까 봐 떡 몇 개를 집어 들고 결혼식장 주변을 조용히 걸었다. 사진 촬영도 당연히 하지 않았다. 나는 다시 삼촌 차를 타고 집에 돌아왔고, 아무렇지 않게 공부를 했다.


결혼식 전날 외출한 엄마, 아빠는 일주일이 지난 뒤 신혼여행에서 돌아왔다. 미안하다고 했지만, 그게 뭐 미안할 일인가. 각자 사정이란 게 있고, 나는 나대로 잘 지냈는걸.



엄마, 아빠는 언제부터 아는 사이였을까? 나는 모른다. 다만 부모님의 신혼생활은 똑똑히 기억한다. 그때 내가 초등학생이었으니까. 나는 엄마를 10살 때 처음 만났다. 아빠가 어느 날 조심스럽게 어떤 누나를 소개해줬다. 한동안 누나와 자주 만나서 놀고, 같이 공부도 하고, 같이 살았다. 지금에야 당연히 나의 엄마이지만, 엄마는 단 한 번도 내게 '엄마'라는 단어를 강요하지 않았다. 내가 익숙해질 때까지 그저 기다려줬다. 덕분에 어느 날, 내 마음에 엄마라는 단어가 들어왔고, 그날부터 나는 엄마를 엄마라 불렀다.


돌이켜보면 그때의 엄마는 정말 어렸다. 나를 처음 만났을 때 엄마의 나이는 서른. 이 글을 쓰는 나보다 어렸던 엄마는, 열 살 아들과 여덟 살 딸을 만났다. 만약 지금 나라면 초등학생인 두 아이가 있고, 사업이 망해서 반지하 월세를 사는 남자와 사랑하고 결혼할 수 있을까? 나는 확답을 못하겠다.



최근 왜 엄마가 아빠를 좋아하는지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는 순간이 있었다. 여자 친구와 함께 한 식사자리에서 엄마가 여자 친구에게 물었다. "우리 아들 어떤 점이 좋았니?" 여자 친구가 말했다. "다른 점도 많지만 이 사람은 정말 착해요." 엄마는 말했다. "맞아, 나도 아빠 착한 것 하나 보고 좋아했어. 세상에 사람이 그렇게 순하고, 정직할 수가 없었어."

엄마가 아빠를 사랑하는 모든 이유가 착하다는 것 안에 담길 수는 없겠지만, 어쩌면 나와 아빠의 소심함은 서로 닮았는지도 모르겠다.








아빠는 고졸, 엄마는 서울 4년제 영문과를 졸업한 당시 그 시골에서 가장 공부를 잘하는 여자였다. 종종 들리는 소식과 엄마의 대학 친구 모임에서 엄마 친구들은 해외지사에서 일하는 임원이거나, 남편은 기업 임원, 잘 나가는 분들이 많았다. 그럼에도 엄마는 아빠를 만나 행복하다고 한다. 아빠가 너무 좋다고.


둘의 사랑과 별개로 우리 가족은 서럽도록 궁핍했다. 그런 가정에서 엄마는 부단히 노력했다. 엄마는 가족을 위해 모든 자격증을 섭렵했다. 내가 어린 시절에 매킨토시 자격증을 다 취득하고, 집에서 사과 마크가 있는 컴퓨터로 일을 했다. 한동안 신문사에서도 일을 했는데, 왜인지 엄마를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던 싸늘하고 보수적인 업무 환경을 견디며, 엄마는 이직할 직장이 구해질 때까지 참고 또 참았다. 그렇게 우리를 챙기며 엄마는 새벽 공부를 했고 6개월 정도 지났을 때,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이제 부동산 일을 하겠다고 좋아했는데, 문제가 있었다. 엄마는 공부만 할 줄 알았지, 사람은 몰랐다. 기대보다 부동산 일은 쉽지 않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의 공인중개사 자격증은 잠들어버렸다.


나는 전단지, 공병 팔기 같은 아르바이트를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했다. 돌아보면 아주 많은 위험에 노출된 채 살아왔다. 한창 공부할 때, 부족한 과목의 문제집과 학원을 요구할 수도 없었다.


엄마는 늘 내게 미안하다고 하며 운다. 내가 조금만 아파도 힘들어한다. 내가 부족한 게 자기 때문이라고 아파한다. 아마 어린 시절의 궁핍함이 지금의 나를 힘들게 하는 건 아닌지, 스스로 미안한 까닭일 게다.


하지만 엄마, 아빠의 성실함과 착함이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인데… 여자 친구는 늘 말한다. "어머니, 아버지는 너무 소심하고 착하신 분들이야"라고. 그런 것 같다.



당연히 엄마의 집, 그러니까 나의 외가에서는 엄마, 아빠의 결혼을 반대했다. 엄마는 할머니에게 잡혀가기도 하고, 따로 살기도 했지만, 결국 다시 우리에게 돌아왔다. 아빠도 외가에 인정받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고, 결국 가족이 될 수 있었다. 나는 뵙지 못했지만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가장 아꼈던 사위는 아빠였다고.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집 근처에서 모신 것도 엄마와 아빠였다. 가장 늦게 만났지만, 가장 아끼는 사위가 되었고, 외할머니의 마지막을 함께 한 가족이 엄마, 아빠였다.


솔직히 나는 아직도 외가 식구들이 어렵다. 그럼에도 요즘은 자주 만나는 편이고, 30년 넘게 만난 친가보다 나를 더 아끼고, 배려해 주신다. 너무 따뜻하시다. 늘 뭐 하나라도 챙겨주려 하고, 늘 도움이 필요할 때 도와주시는 분들은 외가의 가족분들이다. 엄마 덕분에 나도 따뜻하고 좋은 가족을 만났다.








어린 시절 나는 짓궂은 장난을 많이 쳤다. 가족사진 찍을 때 장난으로 엄마 따로, 아빠 따로 찍었는데 그 사진을 본 엄마는 자신을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는 건지 걱정이 많았나 보다. 아빠는 나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ㅇㅇ아, 사진 왜 이렇게 찍었어~?" 내가 "장난!"이랬더니 엄마는 환하게 웃었다. 고기 먹을 때도 엄마, 아빠에게 마늘만 잔뜩 채운 쌈을 먹여드리기도 했다. 아빠는 '에잇!' 하며 뱉었는데, 엄마는 아들이 준 쌈이라고 끝까지 참고 드셨다. 그냥 뱉어도 되는데...


엄마가 우리를 만났을 때 서른이었으니, 충분히 아이를 낳을 수 있었을 것이다. 아빠가 아이를 낳으면 어떻겠냐고 조심스레 물었지만 엄마는 단호하게 거절했다고 한다. 지금 아이들을 잘 길러야 하고, 보살펴야 하기 때문에. 그리고 혹시 아이가 생기면 나와 동생이 차별받는다고 느낄 일이 분명히 있을 거라고. 절대 아이는 낳지 말고, 지금 아이들을 잘 기르자고… 아빠와 약속했다고 한다. 그렇게 엄마는 우리에게 집중했다. 아마 동생이 있었다면, 엄마를 닮아 이쁘고 똑똑한 아이였을 것이다.


그런데 아빠에게 듣기로, 엄마는 늘 불안하고, 지금도 불안해한다고 한다. 내가 엄마를 엄마라고 생각하는지, 아빠가 돌아가시면 본인은 혼자가 되는 것 아닌지... 나는 무던하게 들었지만, 엄마는 아직까지도 우리를 걱정하면서도, 자신이 엄마로 인정받는지 고민하는 것 같다.


나한테는 하나뿐인 엄마인데...

사랑하는 우리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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