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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씀 Aug 24. 2022

반지하 아기를 매일 극장에 데려간 집주인 삼촌

용가리, 휴 그랜트, 줄리아 로버츠와 함께 한 여름방학


어릴 때, 딱 이런 건물 반지하에 살았어.


여자 친구와 걷던 중 우연히 본 빨간 벽돌 건물은 어릴 때 살던 집 구조와 같았다. 아빠의 사업이 망했던 열 살, 월세 보증금 500만 원이 없던 우리 가족은 집을 찾아 서울 온 동네를 돌아다녔다.


마음씨 좋은 빨간 벽돌집의 주인 아줌마만난 덕분에 보증금 300만 원에 반지하 방에 들어갈  있었다. 최근에 알았는데 엄마는 아직도 좋은 날이면 집주인 아줌마를 찾아간다고 했다.


"그 집 큰 아들 삼촌이 강남 영화관에서 영사기 돌리는 일을 했는데, 나 어릴 때 처음 본 영화도 그 삼촌이 일했던 영화관에서 본 거야. 그리고 영화관 자리에서 본 게 아니라, 영사기 앞에서 본거였어.”


“오, 완전 그거, 애기랑 할아버지랑 영화관에서 나오는 영화 뭐지, 시네마 천국! 그거 같다. 왠지 낭만적인데?”


“그런가?”






반지하 투룸에 살았던 우리 가족. 부모님은 일하러 나가면 저녁 8~9시나 되어야 돌아오셨다. 그나마 친구가 있는 동생은 바깥에 나가 놀았지만, 나는 늘 혼자 집에 있었다. 주인집 가족은 바로 위층에 사셨는데, 건물 구조 상 올라가려면 반지하 방을 볼 수밖에 없었다. 아마 모두들 나 혼자 있는 모습을 늘 봤을 거다.


어느 주말에 주인집의 큰 아들 삼촌이 내려와서, 부모님께 물었다. "ㅇㅇ이 여름 방학인데, 뭐해요? 괜찮으면 내일부터 극장에 데리고 가서 영화 보여주고 싶은데, 하루 종일 데리고 있어도 괜찮을까요?" 아빠는 내게 물었다. "ㅇㅇ아, 아저씨가 일하는 극장에 데리고 간다는데 영화 보고 올래~?"


삼촌은 늘 집에 있는 내가 안쓰러웠나 보다. 다음 날, 영화관에 출근하는 삼촌을 따라나섰다. 차를 타고 한참을 달려 강남의 영화관에 도착했고, 나는 영사실 할아버지에게 맡겨졌다. 영화관도 처음, 영사실도 처음이었다.


“오늘 온다고 했던 아기에요! 재밌는 영화 많이 보여주세요!”


영사실에 들어가자마자 할아버지가 내게 물었다.


“라면 부순 거 먹을래?”

“네. 근데 스프 안 찍어 먹어요?”

“그냥 먹는 게 고소해~”


할아버지 제안에 난생처음 스프 없는 생라면을 참고 먹었다. 근데 하나도 안 고소했다.


그때 알게 된 새로운 사실. 당시 극장은 필름으로 영화를 상영했는데, 모든 극장이 영화 필름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a극장에서 용가리를 틀면, b극장에서 스타워즈를 상영한다. 영화가 끝나면 서로 필름을 교환해서 a극장에서 스타워즈를 b극장에서 용가리를 상영하더라. 윗집 삼촌은 영사실 할아버지에게 나를 맡겨 두고, 다른 극장과 필름을 교환하러 계속 뛰어다녔다.


“ㅇㅇ아. 스타워즈 알아? 그거 재밌는데, 지금 보여줄게!”


두 번째 용가리를 보던 중, 뛰어온 삼촌에 이끌려 얼떨결에 다른 영화관을 가기도 했다. 처음 극장보다 훨씬 큰 극장에서 삼촌이 직원 분께 말했다. “우리 아긴데, 스타워즈 보여주려고요. 자리 하나 줘요~” 그랬더니 “아, 그래요? 아가야. 빈자리 아무데나 앉아!” 그렇게 스타워즈를 보긴 봤는데… 스타워즈가 뭔지도 모를 때라, 남은 기억이 하나도 없다.


스타워즈를 보고 다시 삼촌 극장에 돌아왔고, 그날 용가리만 5번은 본 것 같다.






한동안 매일 극장에 갔다. 혼자 방에 누워있으면 삼촌이 “ㅇㅇ아! 극장 가자!” 하면, 따라 나갔다. 몇 번 가다 보니 영화관 사람들하고 친해졌다. 점점 혼자 영화관을 이곳저곳 돌아다녔다. 영사실도, 사무실도 마음대로 들어갔다. 그리고 매일 용가리만 보던 중, 영화가 새로 개봉했다. 노팅힐.


당시 나는 그 영화를 볼 수 없는 나이였지만, 용가리에 지친 아기는 하루 종일 주구장창 노팅힐만 봤다. 한… 3일 연속으로 봤을까. 마지막 상영 때는 맨 앞자리에 누워서 보기도 하고, 손님이 아무도 없을 때는 뛰어다니면서 보기도 했다.


"왜 뛰어다니면서 봤어?"

"심심해서. 혼자 있으니까 심심해서."


사랑이 뭔지 모를 나이였지만,  영화를 너무 많이 봤다.  그랜트와 줄리아 로버츠가 벤치에 누워있는 마지막 장면에서는, 나도 모르게 앞에 뛰어나가 박수도 쳤다. 아무도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스무 살이 넘은 어느 날, 노팅힐을 다시 봤다. 노팅힐만 보면 유난히 그때 생각이 많이 난다.


개학하면서 영화관은 못 가게 되었고, 우리 가족은 또 이사를 가야 했다. 삼촌과는 어떻게 헤어졌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헤어질 줄 몰랐기에 “안녕”을 못 전한 영사실 할아버지는 잘 지내실까. 주인집 삼촌은 잘 지낼까? 지나고 보니 영화관에서의 기억은 참 소중하고도 아쉽다.


아무 즐거움 없고 혼자였던 나의 열 번째 여름을 영화로 가득 채워주고, 노래를 남겨주고, 기억에 오래 남는 일상으로 만들어 준 어른들. 그분들은 내가 이렇게 오래 기억하며 고마워하는 줄 알까?


죽을 때는 그동안의 추억이 필름처럼 돌아간다는데, 내 필름의 한 장면은 영화관 할아버지, 삼촌, 스타워즈, 노팅힐 그리고 용가리일 것 같다.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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