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팔 것인가?]
근로자의 날에 장사를 하리라 마음먹었지만 사실 이미 무엇을 팔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장사를 하리라 마음먹은 두 번째 이유인 '잘할 수 있는 확률이 높은 일을 한다'의 관점에서 보면 너무나도 명확했다. 나는 무려 1988년부터 2023년까지 35년 정도를 충무로와 을지로에서 식당을 운영했던 식당집 아들이다. 그리고 2003년부터 2023년까지 20년 정도를 제주도 돼지고기 기반의 고깃집을 운영했던 고깃집의 사위이기도 하다. 합쳐서 55년의 요식업 경력을 보유하고 있는 집안의 아들이자 사위인 것이다. 어렸을 적에는 나의 이러한 가족적 배경이 그다지 가치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허나, 장사를 하겠다고 마음먹은 지금 이러한 나의 배경이 엄청나게 위대한 유산이자 조금 더 있어 보이게는 브랜드들이 그토록 갖고 싶어 하지만 시간이 축적되어야만 가질 수 있는 Legacy였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것 우리는 알고 있다. 아무리 간접경험이라도 3년 정도의 경험이면 일정 수준이상의 역량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장장 55년이다. 풍월 읊어도 거의 20번에 가까울 정도로 읊을 수 있는 시간이다. 내가 가진 legacy로 인해 나는 나도 모르고 지냈던 요식업에 대한 역량들이 프로페셔널 못지않게 몸에 체득되어 있었다. '잘할 수 있는 확률이 높은 일을 하자'. 식당을 하는 것. 이것은 나에게 있어서는 그 어떤 것보다도 잘할 수 있는 확률이 높은 일이다.
충무로, 을지로가 어떤 곳인가. 점심시간 저녁시간 직장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하면 1년도 못 버티는 요식업의 정글 같은 곳이다. 엄마의 식당은 35년을 살아남았다. 을지로의 난다 긴다 하는(양미옥, 우래옥, 이남장 등) 식당들 사이에서 히든챔피언으로 살아남았다. 히든챔피언은 요리의 효율성과 맛을 극강으로 끌어올린 소스로 제육볶음, 오징어볶음의 탑을 찍었다. 장인어른의 고깃집은 또 어떠한가? 제주도에서의 영업을 시작으로 분당까지 제주흑돼지구이를 끌고 올라왔다. 최고 수준의 고기퀄리티, 장인어른만이 가지고 계신 제주와의 히스토리, 그리고 엄청난 운영의 효율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을 20년 가까이해오면서 잡다한 밑반찬으로 고객을 현혹시키는 가짜가 아닌, 고기 본연의 맛으로 승부하는 분당의 숨은 맛집이 되었다. 나는 이러한 엄청난 리소스를 가족이라는 너무나도 고맙고 감사한 울타리 안에서 간접적으로 흡수할 수 있었다. 누구는 돈 주고 배워야 하는 것들을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자연스럽게 몸에 체득했던 것이다. 이것보다 잘할 수 있는 확률이 높은 일이 있을까? 없다고 본다. 나를 도망가지 않는 시간의 흐름과 그 안에서의 간접경험이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을 현시점에 만들어 주었다.
나는 나의 유산 두 개를 합친 '제주흑돼지구이' 식당을 할 것이다. 두 개의 장점과 효율성을 합치고 그간 엄마와 장인어른의 인생이 녹아든 히스토리를 더해서 내가 받은 Legacy를 더 이어 나갈 것이다.
"무엇을 팔 것인가? 히스토리를 먹고 자란 제주흑돼지를 팝니다."
'이렇게라도 다짐해야 한다. 아직도 계속 마음은 요동친다. 책임져야만 하는 여러 상황만 아니더라도 당장이라도 더 도전해보고 두드려 보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심지어 지금의 나는 걱정거리마저 내 스스로 만들고 다짐을 하게 된다. 장사를 잘 할 수 있을지 돈을 많이 벌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을 하고 있지만 사실 이것은 내가 만들어낸 그리고 내가 다짐하는 걱정이다. 내 마음 속 깊은 곳은 걱정은 전혀 다르다. 꿈을 포기한 내가 우울하지 않을까? 다시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 들면 어쩌지? 내 삶의 두근거림이 없어지면 어쩌지? 이런 것들이 나의 진짜 걱정이지만, 이것조차도 누르고 있다. 이것이 나의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