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기억하기 위해

조지아를 꿈꾸게 된 계기

by 단순

쿠바 까마궤이(Camaguay)에서 탄, 트리니다드(Trinidad)발 산티아고 데 쿠바(Santiago de Cuba)행 버스는 거의 만석이었다. 8시간가량의 여정이어서 서서 가기에는 무리였다. 자리가 없어 통로를 따라 맨 뒤까지 갔다가 다시 앞으로 돌아오던 중 딱 하나, 빈자리를 발견했다. 빈자리 옆에는 거구의 아저씨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좁은 좌석의 버스에서 좌석이 없어 서 있는 몇몇 사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그 자리에 앉기를 원치 않는 눈치였다. 나도 앉을까 어쩔까 고민하던 차에 그만 아저씨가 먼저 내게 말을 걸어온다.


2016-01-29 Trinidad - M9 - 75.jpg Trinidad Cuba 2016


독일에서 온 불프 씨.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불프 씨는 대뜸 여권을 꺼내 한 면을 펼쳐든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비자가 있는 면이었다. 2014년에 평양과 금강산에 갔었다고. 내가 굉장히 신기하다며 호응을 해주자 불프 씨는 신이 난 듯하다.

독일 카젤에 사는 불프 씨는 카젤에도 한국인이 많다고, 한국 아가씨들이 정말 아름답다고 한다. 그 말을 하는 순간 그의 눈에는 아련한 빛이 설핏 감돈다.

"피아니스트인가?"

"아뇨, 피아노를 잘 치고 싶은데 그렇지 못해요."

“피아노 연주를 잘 듣는 게 더 좋을 수도 있어.”

“그렇군요. 전 특히 에밀 길렐스를 좋아해요.”

“오, 길렐스!”

과장스럽지 않게, 그러나 적극적으로 호응해 주는 불프 씨는 겉보기엔 이제 막 환갑을 넘겼을까 싶은 외모였지만 실은 내일모레면 여든이었다. 아, 여든의 나이에 쿠바라니! 불프 씨는 1960년대에 모스크바에 가서 아슈키나지(Ashkenazy)의 연주를 보고 오기도 했단다.


2016-01-31 Camaguey - M9  - 03.jpg Camaguay Cuba 2016


까마궤이에서 산티아고 데 쿠바까지 가는 8시간 동안 불프 씨는 이따금 차창 밖 풍경을 응시하다가 사진을 찍기도 하고 내게 트리니다드에서 찍은 사진을 보여주기도 했다. 또 문득 생각났다는 듯 연주가들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했다. 잠잠히 있다가 잊을 만하면 내게 말을 걸어왔는데 나는 그게 싫지 않았다.


“진부한 질문인데요, 불프 씨가 제 나이로 다시 돌아간다면 무얼 가장 하고 싶으세요?”

“순간순간을 느끼는 거지. 자네는 벌써 그렇게 하고 있지 않나?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좋아하는 여행을 하며 순간순간을 느끼는 일, 아니 음악을 듣다가 좋아하는 음악을 발견하고 여행을 하다가 좋아하는 여행지를 만나는 일일 수도 있겠군. 그것만으로도 인생은 짧네. 자네, 내가 좀 전에 트리니다드에서 찍은 사진을 봐서 알겠지만 난 사진을 그다지 잘 찍지 못해. 그런데 사진 찍는 걸 즐기지. 사진은 꼭 좋은 결과물을 위해서가 아니라 매순간의 느낌을 간직하고 싶어서 찍는 거야."

문득 필드 노트 브랜드의 슬로건이 떠올랐다.

“나는 나중에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 잊지 않기 위해 적는다.”(I’m not writing it down to remember it later, I’m writing it down to remember it now.)

"기억나는 여행지가 있으세요?"

"1960년대에 오토바이를 타고 그루지아를 여행했는데, 최고였어. 멋진 풍경, 좋은 사람들! 자네도 꼭 가 보게."

물론 젊은 시절 여행이었기에 더 좋게 기억될 수도 있었겠지만 그때부터 언젠가 조지아(그루지아)에 꼭 가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날이 저물고 버스 안도 캄캄해졌다. 어두운 버스 구석에서 불프 씨가 무언가 꺼내며 부스럭거린다.

“자네 불 좀 비춰주겠나?”

나는 전화기 불빛을 메모지에 비추었다. 어둠 속에서 불빛에 드러난 건 조그만 메모지였다.

“이건 카젤의 내 주소와 전화번호라네. 나중에 오거든 연락하게. “

아, 팔순이 내일모레인데 뒷날을 기약하시는구나.

이런 나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그가 말했다.

“사람이란 나이가 들면 언제 죽을지 모르지. 그래도 자네가 카젤로 날 찾아와 주었으면 좋겠어. 사람이 진짜 죽은 건 자신의 존재 의의를 잃어버릴 때야. 그래서 나는 여행을 하고 이렇게 자네와 인연을 맺으면서 살아있음을 느낀다네.”

네. 꼭 그렇게 할게요.

하지만 10년이 다 되도록 카젤에는 방문하지 못하고 있다. 대신 그때 불프 씨가 추천해 준 최고의 여행지 조지아에 가보기로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