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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커피 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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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순 Aug 23. 2024

특기는 우산 접기

  유럽에서는 길거리 예술가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온몸에 흰색, 은색, 혹은 검은색으로 페인팅을 하고 가만히 서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기타를 치는 사람, 땀을 뻘뻘 흘려가며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사람도 있다. 

  나도 길거리에서 보여줄 만한 그런 특기가 없을까 고민하다가 생각난 것들. 책 읽기를 좋아하니까 길거리에서 책을 읽고 앉아 있어야 하나. 기품 있는 책상과 의자를 들고 다니며 길거리 한구석에 책상과 의자를 펴 놓고 앉아 책을 읽는 퍼포먼스. 하지만 여행할 때 가뜩이나 짐 많은 걸 싫어하는 나로서는 책상과 의자를 들고 나설 용기가 나지 않는다. 

  이력서라든지 혹은 새 직장에 들어갈 때 적는 신상정보에 취미와 특기를 적으라는 난이 있다. 이게 참 난감하다. 취미야 좋아서 즐기는 것이니 음악 감상, 영화 감상, 등산, 뭐 이런 것들을 적당히 적어도 되지만(그런데 왜 이런 걸 적으라는 거지? 직장 간부가 ‘음, 이 사람 취미가 등산이라니 주말에 같이 등산이나 가자고 할까?’ 정도로 활용하려는 걸까?) 문제는 특기다. 사전에서는 특기를 ‘남이 가지지 못한 특별한 기술이나 기능’으로 정의하고 있다. 그래서 이건 뭔가 오타쿠적인 어떤 걸 써야 할 것만 같다. ‘뭐, 이 정도면 특기라 할 만하지’ 하는 게 내게 대체 무엇이 있을까. 

  사실 나도 모르는 사이 습득한 나의 특기는 꽤 오래 전부터 가지고 있던 기능인데(특기라는 게 그런 건지도 모른다, 금방 익힌 기능이 아니라 오래된 기능인데 알고 보니 특기였어!) 우산 접기다. 우산 중에서도 특히 삼단 우산을 접을 때 나의 특기는 빛을 발한다. 10년도 더 된 특기다.          

  우산 접기에 특별한 손재주가 필요한 건 아니다. 서두르지 않는 마음, 우산에 대한 이해만 있으면 된다. 삼단 우산을 예로 들면 이렇다. 구겨진 우산의 천을 우산 본래의 접혀있던 모양으로 ‘고이’ 접어주고, 한 가닥 한 가닥 우산 천의 겹들을 달래고 어루만져가며 출고될 때 접혀 있던 자국을 따라 균일한 모양으로 접어주면 그만이다. 이게 쉬운 것 같지만 그리 간단치는 않다. 서두르는 마음 때문이다. 혹은 우산을 정성 들여 접어볼 생각을, 사람들이 평소 해보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데이비드 리스는 연필 한 자루 깎아주고 몇만 원씩 받는다는데, 나도 비교적 저렴한 값에 우산 접어주는 사업을 시작해 볼까 생각한 적이 있다. 홈페이지를 만들어서 ‘우산을 그렇게 아무렇게나 접고 다니다니요. 그건 우산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와 같은 문구를 넣고 ‘출고 상태 그대로 접어드리진 않습니다. 대신 당신 곁의 우산을 한층 품격 있게 만들어드립니다. 당신의 우산은 펴져 있을 때보다 접힌 채 당신 손에 들려 있는 시간이 훨씬 많으니까요.’ 정도로 광고를 해서?

  나의 우산 접기 특기는 스스로만 자부하는 특기는 아니다. 나름 인정을 받은 특기라는 말이다. 언젠가 아무렇게나 접힌 우산을 펴서 다시 차곡차곡 잘 접어 준 일이 있었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어느 날 우산을 써야 했는데, 그 사람은 우산을 다시 펴기 아까워 그냥 비를 맞았다고 했다. 그런데 우산 접기 특기로는 유럽에서 버스킹을 하기는 어렵겠다. 장대비가 내리지 않는 한 유럽 사람들은 우산을 쓰지 않으니 말이다. 장대비가 장하게 내리고 있는 가운데 ‘우산 접어요’ 팻말을 들고 서 있는 나를 떠올려 보니 시무룩해진다.

  앞서 특기와 함께 취미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요즘 나의 취미는 사전 들춰보기다. 사전이 딱딱할 것만 같지만, 의외로 재미있는 사실을 사전에서 종종 발견한다. 최근에 찾아본 단어는 ‘판다Panda’다. 스촨성의 그 판다, 서울대공원에서 인기를 끌었던 푸바오의 그 판다 말이다. 판다에는 몇 종류가 있는 모양인데 어떤 것은 아메리카너구릿과에, 어떤 것은 곰과에 속한다고 한다. 아메리카너구릿과라니, 어쩐지 재미있는 이름의 종족이다. 그런데 이 판다에 대한 뜻풀이 가운데 이런 게 있다. ‘빽빽하고 부드러운 털과 넓적한 이빨이 있으며, 나무를 재빨리 기어오른다.” 판다는 큰 덩치 때문에 움직임이 빠르지 않을 것 같은데(내가 본 곰들은 여름날 서울대공원의 커다랗고 둔중한 곰과 연변에서 쓸개즙을 적출당하여 맥아리 없이 슬픈 곰뿐이라 이런 선입견이 있는지도) 나무를 ‘재빨리’ 기어오른다니. 이게 이를테면 판다의 특기라고 할 수 있을까? 

  그나저나 곰처럼 생겼는데 나무에, 그것도 재빨리 기어오른다니 이건 좀 놀랍다. 어렸을 적 동화책에서 곰이 나타나자 재빨리 나무에 기어올라가 살아남은 사냥꾼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판다 중에는 흉포한 녀석도 있다고 하니 웬만큼 나무에 재빨리 오르는 실력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피한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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