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그나기 - 텔라비
나는 술을 잘 마시지 못한다. 한 잔 마시면 얼굴이 벌게지고 두 잔 마시면 스르르 잠이 오고 세 잔 마시면 얼굴이 하얘지다가 구토를 하기도 한다. 365일 중 360일을 술을 마셔 보았는데도 늘지 않았다. 체질인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본의 아니게 과음(?)을 했다. 오전에 독주 한 잔, 저녁에 와인 한 잔.
아침에 어제 코앞까지 갔다가 정신이 없어 보지 못하고 온 보드비스헤비 성 마리 교회(Bodbiskhevi St. Virgin Mary church)에 갔었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하는 비효율 동선이지만 내겐 가보고 싶은 곳을 가는 것이기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 효율성을 따지러 여행 온 것이 아닌 것이다. 교회는 고요했다. 교회 옆에는 무덤들이 있었다.
아레슈페라니 교회(Areshperani Church)를 찾아갔는데 교회 바로 옆에 웬 아저씨들 한 모둠이 모여 있었다. 조금 눈치가 보였지만 멀리까지 일부러 왔으니 교회를 구경하러 갔다.
그런데 아저씨들이 나를 쳐다보며 이리 오라는 손짓을 했다. 가보니 바비큐 파티가 한창이었다. 대뜸 한 아저씨가 내게 빵에 고기를 얹어 주고는 술을 한 잔 주었다. 잔이 작은 걸 보니 독주 같았다. 운전을 해야 해서 못 마신다고 표현했지만 아저씨는 그런 게 어딨어, 괜찮아, 그냥 마셔 하셨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받아 마셨다. 빵을 다 먹자 또 다른 아저씨가 빵과 고기를 주셨다. 거절할 이유가 없으므로 받아 먹었는데 빵은 맛있었지만 고기는 조금 질겼다. 두 차례나 더 술을 권했지만 나는 차마 마시지 못한다며 거절했다.
아까부터 한 아저씨가 온 신경을 내게 쓰며 살뜰히 나를 챙겨 주셨다. 아저씨 사진이라도 찍어 둘걸. 떠나올 때도 유독 그 아저씨가 끝까지 내게서 시선을 거두지 못하셨다.
아, 그 아저씨가 낯이 익다 했더니 피아니스트 호로비츠와 쏙 닮았다.
숙소는 텔라비의 티니코스 게스트하우스(Tinikos Guesthouse). 5시가 넘어 숙소에 도착했는데 주인 할아버지가 맞아 주신다. 이 할아버지는 쳇 베이커를 닮았다. 숙소에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만 계셨다. 할아버지가 약간의 영어를 하시고 영업을 하시는 것 같았다. 추천할 만한 식당이 있냐고 여쭈었더니 카필로니(Kapiloni)라는 식당을 추천해 주셨다. 할머니도 음, 카필로니 하며 그곳이라면 인정, 이라는 분위기였다.
카필로니는, 음식은 나쁘지 않은데 서비스가 영 별로였다. 혼자 왔다고 괄시하는 건지 20분이 넘도록 주문도 받지 않았다. 손님이 많았던 것도 아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대뜸 현금만 받는다고 한 것도 나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
숙소 방은 꽤 넓었다. 하지만 조금 추웠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와인을 한 잔 주셨다.
호의를 거절하기 어려워 받긴 했지만 난감했다. 나는 와인을 마셔도 취한단 말이다. 성의를 생각해서 한 모금 마셔 보았더니, 괜찮다. 홀짝홀짝 두세 모금 마시는데, 맛있다. 어느새 한 잔을 다 비우고 말았다. 급기야 할아버지를 찾아가 이 와인을 살 수 있느냐고 물었다. 할아버지는 어딘가로 가시더니 한참 만에 와인 두 병을 들고 오셨다. 두 병에 20라리, 한국 돈으로 1만 원 정도다. 그런데 이게 그야말로 개인적으로 빚은 와인이라 병이 영 부실하다. 생수병에 담아 둔 것이다. 남으면 한국에 가져가면 되고 아니면 내가 다 마셔버릴 테다. (이런 객기라니)
내일은 먼 길을 가야 한다. 킬로미터 수는 얼마 안 되는데(190킬로가 채 안 된다) 네댓 시간이 걸린다. 와인도 마셨으니 잠을 잘 잘 수 있을 것 같다. (2025.1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