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음 혹은 뮤지션들과의 조우

시그나기 - 텔라비

by 단순

나는 술을 잘 마시지 못한다. 한 잔 마시면 얼굴이 벌게지고 두 잔 마시면 스르르 잠이 오고 세 잔 마시면 얼굴이 하얘지다가 구토를 하기도 한다. 365일 중 360일을 술을 마셔 보았는데도 늘지 않았다. 체질인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본의 아니게 과음(?)을 했다. 오전에 독주 한 잔, 저녁에 와인 한 잔.



비효율 동선의 아름다움


아침에 어제 코앞까지 갔다가 정신이 없어 보지 못하고 온 보드비스헤비 성 마리 교회(Bodbiskhevi St. Virgin Mary church)에 갔었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하는 비효율 동선이지만 내겐 가보고 싶은 곳을 가는 것이기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 효율성을 따지러 여행 온 것이 아닌 것이다. 교회는 고요했다. 교회 옆에는 무덤들이 있었다.


2025-10-18 Sighnaghi-Telavi_X2D ii_01-편집.jpg Bodbiskhevi St. Virgin Mary church



뮤지션들과의 조우


아레슈페라니 교회(Areshperani Church)를 찾아갔는데 교회 바로 옆에 웬 아저씨들 한 모둠이 모여 있었다. 조금 눈치가 보였지만 멀리까지 일부러 왔으니 교회를 구경하러 갔다.


아레스페라니(Areshperani) 교회 인근 아저씨들의 바비큐 파티

그런데 아저씨들이 나를 쳐다보며 이리 오라는 손짓을 했다. 가보니 바비큐 파티가 한창이었다. 대뜸 한 아저씨가 내게 빵에 고기를 얹어 주고는 술을 한 잔 주었다. 잔이 작은 걸 보니 독주 같았다. 운전을 해야 해서 못 마신다고 표현했지만 아저씨는 그런 게 어딨어, 괜찮아, 그냥 마셔 하셨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받아 마셨다. 빵을 다 먹자 또 다른 아저씨가 빵과 고기를 주셨다. 거절할 이유가 없으므로 받아 먹었는데 빵은 맛있었지만 고기는 조금 질겼다. 두 차례나 더 술을 권했지만 나는 차마 마시지 못한다며 거절했다.

아까부터 한 아저씨가 온 신경을 내게 쓰며 살뜰히 나를 챙겨 주셨다. 아저씨 사진이라도 찍어 둘걸. 떠나올 때도 유독 그 아저씨가 끝까지 내게서 시선을 거두지 못하셨다.

아, 그 아저씨가 낯이 익다 했더니 피아니스트 호로비츠와 쏙 닮았다.

vladimir horowitz.png Vladimir Horowitz


숙소는 텔라비의 티니코스 게스트하우스(Tinikos Guesthouse). 5시가 넘어 숙소에 도착했는데 주인 할아버지가 맞아 주신다. 이 할아버지는 쳇 베이커를 닮았다. 숙소에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만 계셨다. 할아버지가 약간의 영어를 하시고 영업을 하시는 것 같았다. 추천할 만한 식당이 있냐고 여쭈었더니 카필로니(Kapiloni)라는 식당을 추천해 주셨다. 할머니도 음, 카필로니 하며 그곳이라면 인정, 이라는 분위기였다.


chet baker.png Chet Baker


카필로니는, 음식은 나쁘지 않은데 서비스가 영 별로였다. 혼자 왔다고 괄시하는 건지 20분이 넘도록 주문도 받지 않았다. 손님이 많았던 것도 아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대뜸 현금만 받는다고 한 것도 나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


숙소 방은 꽤 넓었다. 하지만 조금 추웠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와인을 한 잔 주셨다.


IMG_8663.JPG?type=w773 숙소 할아버지가 주신 와인


호의를 거절하기 어려워 받긴 했지만 난감했다. 나는 와인을 마셔도 취한단 말이다. 성의를 생각해서 한 모금 마셔 보았더니, 괜찮다. 홀짝홀짝 두세 모금 마시는데, 맛있다. 어느새 한 잔을 다 비우고 말았다. 급기야 할아버지를 찾아가 이 와인을 살 수 있느냐고 물었다. 할아버지는 어딘가로 가시더니 한참 만에 와인 두 병을 들고 오셨다. 두 병에 20라리, 한국 돈으로 1만 원 정도다. 그런데 이게 그야말로 개인적으로 빚은 와인이라 병이 영 부실하다. 생수병에 담아 둔 것이다. 남으면 한국에 가져가면 되고 아니면 내가 다 마셔버릴 테다. (이런 객기라니)


내일은 먼 길을 가야 한다. 킬로미터 수는 얼마 안 되는데(190킬로가 채 안 된다) 네댓 시간이 걸린다. 와인도 마셨으니 잠을 잘 잘 수 있을 것 같다. (2025.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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