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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eYa Jun 06. 2021

여행의 시작은 한계의 끝에서

여행이야기 - 첫 번째


여행이라는 도피


사회생활을 하면서는 항상 무언가 결핍되어 있다는 느낌과 함께였다. 어떻게든 섞여가고는 있지만 물과 기름처럼 넘어서지 못하는 선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나는 모쪼록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살아가고 있었지만 수많은 모순들을 인식하고 있었고, 내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몇몇 모순들에 한해서는 상당한 거부감을 가졌다. 그렇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을 받아들여야 할 때 나의 가슴은 터질 것처럼 답답해지곤 했다. 남들과 같은 수순의 생을 살았어도 현실과 나의 타협점을 찾는 것은 무척이나 힘들었다. 삶은 나날이 심드렁해져갔다.


그런 내게 있어 여행은 도피였다. 버티고 버티다 한계의 끝에 달했을 때, 기어코 나는 떠나고자 마음을 굳혔다. 여행을 결심하는 한계점에 이르기까지 차곡차곡 쌓아올린 소외된 마음들. 그것들을 견디지 못하는 때가 올 때 내 여행은 시작되었다.


사회에서 배제되더라도 세상에 속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일을 하지 않아도, 돈을 벌지 않아도, 버티지 않아도, 나는 여전히 세상에 속한 하나의 존재이고 그 존재 자체의 숭고함으로 나답게 생을 살아내고 싶었다. 그래서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떠남이 답이 아님을 알지만 그때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마 그것이 최선이었을 것이다.


“니는 왜 그렇게 하지 말라는 짓만 하노!”

나는 왜 엄마가 하지 말라는 짓만 자꾸 하고 싶을까나. 4개월 동안 해외여행을 가겠다는 나에게 엄마는 연신 미친 짓이라고 했지만 이제 떠나지 않고는 못 배기겠는 마음이었다. 전형적인 삶의 단계를 밟아온 가족들 사이에서 또 나만 도드라진 꼴이 되었다. 그렇게 수많은 불이해 속에서 나는 짐짓 쿨하게 배낭을 쌌다. 누가 뭐라던 내가 하고 싶은 건 해야겠으니까. 무엇보다 나는 더 잘 살기 위해 떠나는 것이었다. 나에게 여행이란 인생에 대한 정신적 투자였다. 사실 그것을 온전히 이해해주는 사람은 꽤나 드물었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일단은 나 스스로 납득한다면 떠나는 이유는 그것 하나로 충분했다.







여행자이기에 가능해지는 것들


평소에는 하기 힘들었던 것들도 여행지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된다. 혼자 밥을 먹는다거나, 낯선 사람에게 길을 묻는 것이라던가, 구태여 흥정 따위를 하는 것이라던가. 심지어는 게스트하우스 문을 열고 낯선 사람들 품으로 발길을 내딛는 것마저 내게는 불편한 일이었다. 하지만 여행을 와서는 그런 것들이 아무렇지도 않았다. 달라진 것은 공간 하나 뿐인데 단지 여행자라는 이유만으로 아무렇던 것들이 아무렇지도 않아졌다. 그렇게 현실에서 한발자국 빗겨난 여행자의 삶에 나는 나날이 녹아들었다.


아무렴. 나는 어디서든 잘 자고, 잘 먹고, 잘 싸는 원체 투박한 인간이다. 세련되게 꾸미고 멋 내는 대신 헐렁한 나시티와 냉장고바지를 입고서 맹숭한 얼굴로 억척스레 골목을 여기저기 후비고 다니는 게 훨씬 마음이 편했다. 길바닥에 쪼그려 앉아 싸구려 샌드위치를 씹어 먹고 있어도 아무렇지 않다는 것이 행복했다. 나는 곧게 다린 정장을 차려입고서 능숙하고도 세련된 말투로 회의를 진행하고 거래처와 업무를 보면서 노련하게 상사의 말을 받아낼 수 있는 그런 사회적 인간이 아닌 것이다. 진심이 아닌 말들은 하지 못하는 성격이었기에 온통 진심으로만 행동하고 말할 수 있는 이 여행의 순간들이 참으로 맘 편하고 행복했다.







다시 밥벌어먹는 삶으로


짧지도 길지도 않았던 여행 이후로 내 삶이 크게 달라진 것은 아니다. 여행이 끝난 후 여전히 밥을 벌어먹어야 하는 생존의 현실이 순번표를 들고 이제는 자기 차례라며 어김없이 손을 들었다. 여행의 기억조차도 시간이 지나면 잊히겠지만 그 순간들의 마음은 속에 쌓였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번쩍- 내 삶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해되지 않던 것들이 이해되고 할 수 없던 것을 할 수 있게 되는 그 때. 낯선 세상을 오롯한 시선으로 받아내던 그 길 위에서의 시간들이 인생의 그러한 순간, 넘치기 직전 결정적 한 방울의 역할을 할지도.


그렇게 27살에 홀로 떠난 첫 여행 이후, 나는 여행이 주는 그 위험한 자유의 맛을 알았다. 그것은 떠나지 않고는 도저히 경험할 수 없는 치명적인 감각이었다. 이 감각을 평생 체험하고 싶어졌다. 계속 여행하며 살 것은 이제 불 보듯 뻔한 사실이었다.






내 안에 은밀히 감추어둔 열병 같은 것들. 어떤 장면이나 구절에서 불쑥 치솟곤 하는 내밀한 뜨거움. 내 인생은 그런 것들을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흘러온 것인지도 모른다. 자꾸만 길 위에서 방랑하는 것 역시 그러한 방향성의 한 파문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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