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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디 Sep 28. 2022

네가 있어서 그곳이 좋았던 걸까?

포카라, 네팔


Y를 처음 만난 건 동행과 헤어지고 혼자 하산하던 첫날의 밤이었다.



그곳은 촘롱이라는 ABC를 오르는 트레커들이 쉬고 하룻밤을 묵는 꽤나 큰 체크포인트였다. 도착 시각은 좀 늦었지만 촘롱은 숙소가 많다는 이야기에 기대하며 도착한 롯지였다. 하지만 기대는 물거품. 롯지에 방이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좌절스러움에 어찌할 바를 모르던 중, 롯지 사장님은 남는 창고 방이 하나 생겼는데 그곳도 괜찮냐고 물었다. 누가 채가기라도 할까 봐 무서워 얼른 너무 좋다는 의사를 밝혔다.



침대 하나로 꽉 찬 방 하나에 간신히 짐을 내려놓고 저녁 식사를 하러 주방으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수고한 나에 대한 보상으로 오늘도 신라면을 주문했다. 누가 쳐다보는지도 모른 채 정신없이 라면을 먹는데  마주편에 한 사람이 나와 똑같은 걸 주문해 먹고 있지 않은가. 순간 너무 주변 신경도 안 쓰고 본능에 충실했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건실해보이는 청년이었기 때문. 눈이 마주친 나는 한국인이세요?라고 물었고,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릇을 모두 비우고 주방 식탁에서 시간을 때우면서 내심 그가 더 말을 걸어오길 기다렸다. 핫초코까지 시키며 시간을 때워보았지만 내게 별 관심이 없는지 정적만이 흘렀다. 짐을 챙겨 올라가던 찰나 그가 맥주 한 잔 하지 않겠냐는 제안을 건넸다. 예스! 잠시 방에 물건을 두고 오겠다고 했다. 그리고 알이 꼬질꼬질한 안경 대신 렌즈를 장착하고 돌아왔다.



Y와의 대화는 신선하고 유쾌했다. 필터 없이 그에게 생각나는 대로 말을 시원하게 뱉었고 아랑곳하지 않고 그도 내 말을 되받아쳤다. 우리는 처음 만난 사이라 볼 수 없게 장난을 쳤고 농담을 건넸다. Y도 나도 짖꿎었다. 맥주의 흥도 가벼이 올랐겠다. Y와의 시간이 블랙홀처럼 빨려 들어갔다. 순식간이었다.



대화의 끝 무렵쯤, Y에게 특이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쪽도 만만치 않은 것 같은데, 라는 말이 돌아왔다. 동시에 나는 특이하다는 얘기 들어본 적 있죠?라고 물었다. 그는 잠시 생각하는 듯 머뭇거리더니 “옛날에는 그런 소리 많이 들었는데, 회사 다니면서 그런 게 많이 사라진 것 같다”라고 답했다.





하산하는 나와 달리 Y는 정상을 향해 오르는 중이었다. 아쉬웠다. 내려와서 다시 마주칠 수 있을까. 다음날 아침 Y는 이런 나의 마음도 모른 채 해맑은 표정으로 인사를 건넸다. 번호를 물어봐야 할까. 아니 여긴 해외니까 카카오톡 아이디가 좋겠지. 함께 아침을 먹는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머릿 속이 그에 대한 생각으로 복잡한 찰나, Y는 포카라에 내려가면 이런저런 정보를 물어보고 싶다며 능청스럽게 나의 번호를 알려줄 수 있냐고 했다. 나도 모르게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내리며 Y의 핸드폰에 나의 번호를 꾹꾹 눌렀다. 부담스럽지 않도록 직접적으로 번호를 물어보지 않는 Y의 능숙함조차 내 마음에 쏙 들었다.



반가운 마음으로 그에게 작별 인사를 건넬 수 있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하산했다. 그가 안나푸르나에서 언제쯤 내려올까, 포카라에 도착해서는 약간의 긴장이 감돌기까지 했다. 때 아닌 엄청난 쇼핑을 했다. 배낭 여행자에겐 허락되지 않는 사치였다. 귀걸이와 원피스 두 벌을 샀다. 그냥 예뻐서 샀는데 그를 보러갈 때 원피스를 입고 나가면 어떨까, 라는 상상을 해버렸다. 오버인 것 같다는 생각에 나의 상상을 다시 머릿속 저 뒤편으로 구겨 넣었다.



드디어 기다리던 그의 연락이 왔다. 트레킹을 마치고 포카라에 도착했다는 기별이었다. 그의 문자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냉큼 달려 나가고 싶었지만 너무 기다린 티가 나지 않기 위해 답장을 최대한 굼뜨게 하려 했다. 하지만 실패한 듯하다. 얼마 되지 않아 그와 마주 앉아 밥을 먹고 있었다.



그가 다음날 아침 식사도 같이 할 수 있냐고 물었다. 겉으론 덤덤한 표정을 지었지만 속으론 신이 났다. 그는 장기 배낭 여행자는 아니었다. 추석을 맞아 연차를 붙여 트레킹을 온 직장인이었다. 그말은 즉슨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아침은 곧바로 나에게 처참한 기분을 안겨주었는데 그는 여자 친구가 있다고 했다. 한껏 붕 떴던 기분이 한순간에 땅 밑으로 추락했다. 아니, 여자 친구가 있다고? 나 여태 뭐한 거야? 표정 관리가 어려워졌다.






호수 '페와(Fewa)'



그의 연락을 피하고 연락이 와도 서너 시간 후에 답장을 건넸다. 어딜 돌아다니고 싶은 의욕도 사라졌고 상심한 마음을 숨기고자 그를 피해 혼자 숙소에 있었다. 그는 나에게 계속 밥을 같이 먹자거나 어디를 보러 가자고 꼬셨다. 연락이 오면 좋은 건 사실이었다. 그가 나를 계속 원하길 바랬다.


나의 마음은 그를 원하는데도 그를 거절하고 하루종일 숙소에 있는 내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따분함도 절정에 달았다. 그를 더 이상 밀어낼 수 없다는 명분으로 그를 만나러 갔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해사한 미소로 웃는 그가 나를 맞았다. 그와 밥을 먹고 카페 가서 커피도 마시고 시내 구경도 했다. 그제야 내 마음에 활기가 띠었다. 그가 찍어준 나의 모습을 친구들에게 보내니, 그렇게 즐겁냐며 얼굴이 피었다,고도 이야기했다.



그와의 대화는 유쾌하고, 때로 진지하고 성찰적이었다. 그는 깊이 있는 대화를 좋아하는 류의 남자였고 나도 그와의 대화가 너무 즐거웠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대화의 깊이와 수준에서 내가 부족하다는 느낌까지 받았다. 그의 질문 앞에 때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는데 그런 면에서 그는 나를 당황하게 했다.



사랑의 권력 구조에 관한 이야기도 나눴다. 누가 더 사랑하느냐에 따라 어쩔 수 없이 권력이 나누어지는 관계. 아름다우면서도 잔인한 사랑의 일면. 사랑에도 갑과 을이 존재한다는 말. 지금 연애는 자신이 갑인 것 같다고 했다. 좋은 거 아니냐고 묻자, 자신은 을인 연애를 하고 싶다고 했다. 다시 사랑에 깊이 빠져들고 사랑에 몸살을 앓고 싶다고.



책을 좋아한다는 말에 자신이 인상 깊게 읽었던 책도 공유해주었다. <유혹의 학교>. 제목을 들었을 때 풉 하고 뿜었다. 이렇게 노골적인 제목은 뭐람. 그의 취향에 실망스러웠다. 그런 내게 장황한 설명을 해주었지만 귀에 들어오는 건 별로 없었고 결국 그는 나를 유혹한 거였다는 생각만 진하게 남았다.



그는 은근하게 질리지 않을 정도로만 나를 유혹했다. 나의 숙소에 가고 싶어 했고 나의 침대를 궁금해했다. 둘만 함구하면 아무도 모를텐데. 여행지에서 남모를 비밀 하나 정도는 만들고 가도 나쁘지 않을 듯 싶었다. 술과 더불어 그의 말과 손길에 나의 이성이 흐려졌다.




그를 뿌리치고 홀로 숙소에 돌아와 남는 괴로움은 내 몫이었다. 아무도 모를 텐데, 눈 한 번만 감으면 되는데 그냥 그거면 되는데. 나는 외로움과 그리움에 몸서리쳤다. 여자친구도 여행 중에 만난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이런 방식으로 항상 연애를 해오는구나 싶었다. 여행지에서 관계 맺은 뭇사람들 중 하나가 되기도 싫었다.



차라리 여자 친구가 있다는 말을 하지 말지. 몰랐다면 나를 속였다면. 그 말을 하고서 당당하게 나를 유혹하는 뻔뻔한 사람. 자신의 속임수가 아닌 온전히 나와 너의 선택으로 만남을 갖길 바라는 마음. 책임을 분담하고자하는 마음. 그는 진정한 나쁜 남자였다.






그가 떠나는 날에는 싱숭행숭했다. 그가 머물렀던 시간 꼬박 우리는 끼니를 함께 했고 보트와 오토바이를 탔고, 술을 마시고 대화를 나눴다. 그의 유혹을 뿌리치는 것도 힘들었지만 그가 한순간 사라지는 것도 괴로웠다. 그가 떠나는 날 아침, 배낭을 멘 그를 배웅하러 나왔다. 그를 보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니까.



그는 마지막으로 한 번 안아보자고 했다. 나를 꽉 안았다. 생각보다 강한 그의 힘에, 그와의 접촉에 야릇한 감정이 들었다. 곧 보지 못한다는 생각에 이내 애틋함으로 바뀌었다.






그가 떠나고 포카라가 텅 빈 것처럼 느껴졌다. 해야 할 일도, 만날 사람도 없었다. 포카라에서 가장 맛있다는 레스토랑에 일행과 부러 찾아갔지만 먹는 내내 이 좋은 곳을 그와 같이 왔으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으로 가득 찼다. 그와 먹었던 질긴 야크 고기를 파는 식당이 그리웠다.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에 대한 감정을 떨쳐버리기 위해 하루빨리 이 도시를 떠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여행자 거리로 돌아와 버스를 예매했다. 다음날 아침 떠나는 티켓이었다. 그제야 붕뜬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는 듯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이 도시와도 작별 인사를 해야 했으니.



두 달 뒤 Y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내가 한국에 들어온지 이틀 정도 지난 날이었다. 그는 나의 귀국 날짜를 기억해 연락했다고 했다. 그리고 한 번 보고 싶다고. 오랜만에 들은 그의 음성과 담백한 언어들이 너무 달콤했다. 무척이나 상기된 채로 그와 통화를 했다. 하지만 결국 또 난 바쁘다는 핑계로 만남을 거절했다. 두려웠다. 빠져드는 내 마음이 겁났다. 한 번 더 그가 붙잡아주길 바랬지만 이후 그를 만난 적은 없다.



그와의 만남으로 한동안 포카라를 떠올릴 때면 내게 강렬한 아련함이 느껴진. 설레고 붕뜨고 혼자 실망하고 낙담한 감정이 그곳에 고여 있었다. 다시 포카라를 찾는 날에는 새로운 기억을 새로운 감정을 그곳에 두고 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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