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 늪에서 늪으로

by 단우

살을 빼고 예뻐졌다는 말을 들은 사람은 안다. 그 시선이 얼마나 달콤한 독인지. 살이 통통하게 올랐을 때는 '그만 먹어라', '또 먹냐' 소리만 듣고 살다가, 살을 빼고 나면 '말라가지고 더 먹어야겠다', '왜 이렇게 조금만 먹어! 더 먹어!'라는 소리를 밥먹듯이 듣게 된다. 살 빼기 전에는 아빠 판박이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는데 (아빠도 못생긴 편은 아니었지만 나는 딸이다.) '몰랐는데 살 빠지니 엄마 닮았네(엄마가 여리여리하고 예쁜 편임)'라는 말을 듣고 기분이 어찌나 좋던지. 영원히 마르고 예쁘고 싶었다. 폭식증에 시달리기 전까지는.


머리를 짧게 자른 뒤에는 외모에 집착을 덜 하게 되었다. 선크림 정도만 바르거나 기초적인 화장정도 하고, 멀끔하게 보일 수 있을 정도로만 신경 쓰고 다녔다. 그럼에도 준비하는 시간이 매우 줄었고, 통풍이 잘 되고 편한 옷들을 입다 보니 활동하는 것도 편했다. 조이는 옷을 입지 않으니 살이 조금 찌는 것은 바로 알아채지 못했고, 먹는 데 있어서 부담감을 조금씩 내려놓게 되었다. 음식 메뉴에 대한 강박, 먹는 시간에 대한 강박, 간식에 대한 강박을 하나씩 내려놓았다. 운동은 셰어하우스 친구들과 집안에서 스트레칭을 같이하고 산책을 하는 정도로 했는데 이렇게 먹고 운동해도 걱정했던 것만큼 살이 많이 찌지 않았다. 걱정이 무색하게도 몸무게는 잘 유지되었다.


다만 가장 내려놓기 어려웠던 건 '많이 움직여야 한다'는 강박이었다. 하루에 만보이상 걷지 않으면 찜찜했다. 먹은 게 그대로 살로 갈까 두려웠다. 폰을 켤 때마다 걸음수를 확인했고, 저녁이 되어도 목표에 못 미치면 억지로라도 밖으로 나갔다. 걸음 수를 많이 못 채운 날에는 아무리 피곤해도 먼 곳까지 산책을 다녀왔다. 만보를 넘겨야 마음 놓고 집에 들어올 수 있었다.


숏컷으로 살면서 전이라면 상상도 하지 못했을 뱃살을 얻었다. 처음 들어간 회사에서 잦은 야근을 하며 오래 앉아있기도 했고, 스트레스로 간식을 먹기 시작한 것이 원인이었다. 밤 10시가 넘어 퇴근하는 길엔 꼭 편의점에 들러 과자를 사는 습관이 생겼다. 야근까지 했는데 맛있는 거라도 먹지 않으면 너무 억울했기 때문이다. 집에 가서 아무 생각 없이 과자 봉지를 뜯고, 유튜브를 보며 생각 없이 입 안에 밀어 넣었다. 그러다 보니 뱃살이 조금씩 잡히기 시작했다. 남들이 보기에는 아직 마른 편이었지만, 나는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했다.


'이대로의 나도 괜찮아!'라고 스스로를 세뇌하며 애써 뱃살의 존재를 외면했다. 사실은 신경이 쓰여 미칠 것 같았지만 나는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야 하니까. 뱃살이 찐 내 모습을 외면하는 것을 택한 것 같다. 어찌 보면 잘못된 방식이기도 했다. 건강하게 운동도 하고, 살이 찌는 걸 방치하지 않았다면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좋았을 것 같은데 그때의 내게는 어떻게 하면 좋다고 조언해 줄 사람도 없었고 조언을 받을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스스로가 지르는 비명을 무시하고 어떻게든 사회생활에 적응해 번듯한 직장인이 되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나의 고통은 외면한 채로 잘하려고 노력만 하는데 잘 흘러갈 리가 없었다. 정신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피폐 해질 때 즈음 일을 관뒀다. 가끔가다 너무 스트레스받는 날이면 이전의 폭식하고 토했던 습관이 불쑥 나왔다. 먹고 토하고 또 허해지면 먹고 토하고를 반복하다가 잠들어 무의미하게 휴일을 보내기도 했다. 토한 뒤 기진맥진해서 아무것도 못하고 누워있으면 자괴감이 몰려왔다. '애초에 시작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토하려고 하지 않았을 텐데.' 라며 토하는 걸 시도했던 과거를 후회했다. 이젠 다이어트 때문이 아니라 스트레스를 폭식과 토하는 자학행위로 풀게 된 것이다.


서울생활에 지쳐 부모님과 함께 살기 위해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본가로 내려갔다. 부모님이 출근하는 소리에 눈을 떠 배웅하고, 다시 잠을 청하는 날이 많았다. 스마트폰을 보다가 동이 트고 나서 잠들었기 때문이다. 느지막이 일어나 냉장고 앞을 서성이다가 엄마가 만들어둔 반찬에 밥을 먹고 허해서 간식으로 과자나 빵에 손을 댔다. 먹다 보면 죄책감이 들기 시작했고, 토해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그러면 라면까지 한 봉지 끓여 먹었다. 배가 터질 것 같은 느낌이 들 때쯤엔 물을 잔뜩 먹고 다 게워내 버렸다.


부모님과 함께 살 때에도 가끔 너무 과식했다 싶으면 몰래 토하기도 했다. 도파민에 빠져 무기력하게 하루를 보내는 날이면 부모님이 돌아오기 전까지 폭식하고 토하기를 반복하며 하루를 더 엉망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면서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을 만나고, 일을 하고, 돈을 벌며 그래도 가치 있는 뭔가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의욕이 생겼다. 다시 운동도 하고 먹는 것에 대한 집착도 옅어졌다. 이제는 다이어트를 하기 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몸은 정직했다.


이때부터였을까, 정확히 언제부터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위장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무엇을 먹어도 체한 적이 없었는데 이젠 조금이라도 스트레스받거나 긴장되는 상황에서 음식을 먹으면 바로 얹히고 속이 아파왔다. 그리고 고기나 술을 먹으면 먹을 당시에는 괜찮다가 속이 뒤틀리는 통증이 되어 나를 괴롭혔다. 한번 아프기 시작하면 잠을 못 잘 정도로 괴로웠고, 손을 따고 소화제를 먹어도 해결이 되지 않아 결국 마지막 방법으로 토를 했는데, 토하고 좀 지나니 속이 편해졌다. 오랜 제거형 폭식증의 여파로 소화능력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처음에는 기분 탓이겠지 생각했는데 점차 소화가 잘 안 되어 고통받는 순간이 늘어가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폭식하고 토하는 습관이 내 건강을 망쳤다는 걸. 다행히 이가 썩거나 손등에 흉터가 생기진 않았지만, 소화능력이 눈에 띄게 떨어졌고 토해서 목이 상해버린 건지 항상 목이 간질간질한 느낌이 있다. 한 번 목감기에 걸리면 토할 것 같이 기침해도 간질거림이 사라지질 않는다.


이젠 고기도 많이 먹지 못한다. 양껏 먹었다가는 바로 얹혀서 속 쓰림에 뒹굴거리다 잠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술을 마시는 것도 두렵다. 조금만 마셔도 온몸이 아픈 느낌이 들어 반주도 못한다. 몸은 내가 나를 얼마나 함부로 대했는지 기억하고 있는 듯했다.


과거로 돌아간다면 도시락을 싸들고 쫓아다니면서라도 말리고 싶다. 절대, 절대 다이어트 하지 말라고. 토할 생각은 죽어도 하지 말라고.


하지만 과거의 나는 내 말을 듣지 않겠지. 그땐 그게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었으니까.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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