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식증만 아니었다면 학교 생활에 좀 더 충실할 수 있었을까? 그 돈을 다 모았다면 지금쯤 몇백은 더 있었을 텐데...'
'폭식증 이전에, 연애를 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이렇게까지 스스로를 미워하지 않았을 텐데.'
'어린 시절 가족 중 한 명이라도 있는 그대로도 충분히 예쁘다고, 어떤 모습이어도 사랑한다고 해줬더라면...'
혼자 있는 시간만 되면 이런 생각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과거에 대한 원망과 후회 속에 잠식되어 괴로워했다.
고시원 생활이 힘들어서 중간고사가 끝난 시점에 쉐어하우스로 거처를 옮겼다. 쉐어하우스에 살다 보니 외로울 틈이 없었고 언니 동생들과 친해지고 나니 공허한 틈도 없었다. 폭식하고 토하는 일도 없어졌다. 저녁 늦게 뭔가를 먹으면 불안하긴 했지만 토하고 싶다는 생각까지는 들지 않았다.
그렇게 조금 안정을 찾아가는 듯했지만, 일본인 남자친구와의 이별로 바닥을 친 자존감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누구라도 만나서 내가 별로인 사람이 아니라는 걸 확인받고 싶었다. 당시 거리가 가까운 사람과 연락할 수 있는 앱이 있었고, 연락이 이어졌던 사람이 한 명 있었다. 학교 갔다가 카페 가는 길이라고 답장했는데, 마침 우리 학교 근처에 있다고 해서 얼굴을 봤다. 같이 저녁을 먹는데 대화가 괜찮게 이어졌고, 이후에도 연락을 이어가다가 한 번 더 만나게 되었다. 나름 다정한 사람 같았지만 이성적으로 크게 끌리진 않았다. 그러나 상대방은 내게 호감이 있다고 만나보고 싶다고 했고 고민하다가 알겠다고 했다. 이제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을 만나보고 싶었다.
초반엔 데이트도 하고 좋아하는 티를 내주어서 '나도 이제 좀 연애다운 연애를 하겠구나' 싶었는데,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었다. 저녁만 되면 연락이 끊겼고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잠들었다는 핑계를 댔다. 이전에 사귀었던 남자친구 중에 비슷하게 매번 저녁에 일찍 잤다며 연락이 끊겼던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이 나와 헤어지자마자 다른 사람과 연애하는 사진을 올렸었기에 찜찜했다. 제발 연락만 한 통 하고 자라고, 자기 전에 연락하는 게 그렇게 어렵냐고 몇 번이고 얘기했는데 알겠다고 해놓고 고치질 않았다.
그때는 너무 순진했던 탓인지 잠이 진짜 많은 사람인가? 생각했고 끝까지 회피하고 고치지 않는 태도에 질려 헤어짐을 고했다. 잘못했다고, 노력해보겠다고 말해주면 되는 거였는데, 그러기 싫었는지 그는 '나랑 헤어지고 싶다는 거네?'라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노력할 생각도 없고, 책임지고 싶어하지도 하는 그의 태도를 보니 또 회피형 인간과 만났던거였구나. 깨닫게 되었다. 계속 같은 이야기가 반복되는 것에 지쳐 먼저 헤어지자고 이야기했다. 사귄 지 한 달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내 이야기를 들은 쉐어하우스 사람들이 잘 헤어졌다고 다독여 주었고, 그중 한 명이 소개팅을 해주겠다며 나섰다. 처음 해보는 소개팅에 긴장도 되고 할까 말까 고민했지만, 진짜 괜찮은 사람일 거라고 단언을 해서 승낙했다. 자리에 나가자마자 이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취향이 아니었다. 동갑이라길래 친구처럼 편하게 이야기하다가 저녁 먹기 전 헤어졌다.
마음이 없었지만 그래도 세 번은 만나봐야 하나 고민이 되어 다음 날 동기들과 만나 상담을 했다. 마음이 없어도 만나보는 게 나은지 아니면 그냥 거절하는 게 나은지 물어보았고, 연애 경험이 많은 동기 한 명이 그냥 정중하게 메시지로 거절하라고 조언해주었다. 친구들을 만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장문으로 '이성적인 감정이 느껴지지 않아서 더 만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좋은 사람 만나면 좋겠다.'라는 내용의 카톡을 보냈는데, 갑자기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전화를 받고 싶지 않아서 무시했는데 계속해서 전화가 왔다. 집에 도착한 뒤, '카톡으로 해. 전화하고 싶지 않아.'라고 메시지를 보내고 씻으러 들어갔다.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휴대폰 화면에는 부재중 전화 12통이 떠 있었다.
소개팅 주선자에게 이런 일이 있었다고 무섭다고 털어놓았다. 털어놓는 와중에도 소개팅 상대는 계속 전화를 걸었고, 카톡으로 그렇게 살지 말라는 식의 메시지를 보냈다. 어이가 없어서 내가 왜 그런 말을 들어야 하냐고 답장했는데 또 전화가 왔다. 오타가 가득한 메시지와 계속 오는 전화에 스트레스받아서 결국 휴대폰을 무음으로 해두고 잠을 청했다.
다음 날 술마셔서 그랬다고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짧은 카톡이 왔고, 성의없는 사과에 화가나서 '하지 말라고 하는데 계속 전화하고 그런 식으로 말해서 무섭고 싫었다. 너랑 만나서 4시간 이야기한 게 다였고, 내가 여자친구도 아닌데 그런식으로 말하는 건 좀 아니지 않냐. 다시는 안 만났으면 좋겠다.'라고 메시지를 보낸 뒤 차단했다. 나중에 들어보니 그날 많이 취했었고, 다음 만남을 위해 공방도 예약하고 데이트 할 일정을 다 짜두었기에 화가 나서 그랬다는 이야기였다. 나에게 의사를 물어보지도 않고 혼자서 진행해놓고 화가 났다니 그냥 기가 막혔다. 그렇게 연달아 좋지 못한 경험을 하고 나니 내가 연애를 안 하면 될 일이라는 결론이 났다.
당시에 쉐어하우스에 있던 사람들 중에 페미니즘에 관심 있는 사람이 많았고, 한창 탈코르셋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그리고 실제로 다이어트와 꾸미는 것에 지쳤던 사람들이 탈코르셋을 하고 해방된 기분을 느꼈다는 후기 콘텐츠를 올렸다. 그런 콘텐츠를 볼 때마다 내 이야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쁜 인형이 되기 위해 나를 갉아먹고 있는 느낌. 누굴 위해 매일 아침 몇 시간 들여 꾸미고, 폭식증에 시달려야 하는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나를 갉아먹기만 하는 연애는 이제 하고 싶지 않았고, 누군가에게 예뻐 보이기 위한 노력도 이제는 멈추고 싶었다. 고민끝에 허리까지 오던 긴 머리를 숏컷으로 잘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