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그 빈터에 서서 눈을 감으면

비가 오면 처마 끝에서 물방울이 떨어지고,
햇살은 삐걱대던 툇마루를 타고 스며들어
할머니의 손끝처럼
조용히 하루를 어루만지던 곳.

부엌에서는 늘 무언가 끓고 있었고,
할아버지의 낮은 기침은
저녁 연기처럼
집 안을 오래 맴돌았다.

그러나 세월은
그 모든 것을 데려갔다.
남은 것은 기억뿐,
그 기억마저
풀잎 사이로 스며들어 사라진다.

이제는
돌담도 기울고
지붕은 기억 속에만 남아
문지방을 넘던 발자국들마저
바람에 흩어져 돌아오지 않는다.

돌아갈 고향은 없고
남은 것은 이름 모를 풀꽃들.
그러나 나는 안다,
그 풀 아래
겹겹이 묻힌 시간들을.

가끔 그 빈터에 서서
눈을 감으면
낡은 마루가 다시 숨을 쉬고,
할머니의 부르는 소리가
아직도 나를 붙잡는다.

2026.03.25. 고향집 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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