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를 매개로 펼쳐지는 혁명의 알고리즘

<바벨>1,2/ R.F.쿠앙 (문학사상, 2025)

by 엄마오리
“언어는 그저 말이 아니야. 언어는 세상을 보는 방식이야. 언어는 문명의 열쇠야. 따라서 목숨 걸 가치가 있는 지식이지.”(1권 p.277)


R.F.쿠앙의 장편 <바벨>은 언어와 번역의 힘을 SF와 판타지로 풀어낸 대체역사소설이다. 이 언어에서 저 언어로 옮겨질 때 유실되는 의미에서 힘이 나오고, 그 힘을 은이 포착해 발현한다는 ‘실버워킹’의 능력이 19세기 초반의 영국을 세계 최강대국으로 만든다는 설정이다. 작가 R.F.쿠앙은 스팀펑크와 마법, 정교한 세계관, 아카데미를 배경으로 한 우정과 사랑, 제국주의의 탐욕성에 대한 고찰 등을 이 한 작품에 솜씨 좋게 버무려놓았다. 1996년 중국 광저우에서 태어나 네 살 때 미국으로 이주한 작가는 조지타운대학, 옥스퍼드대학, 예일대학 등에서 중국사와 동아시아 어문학을 공부했다. <양귀비 전쟁>(2018), <옐로페이스>(2023)등의 소설을 발표했으며, <바벨>(2022)은 그가 석사학위를 위해 옥스퍼드에서 지냈던 경험을 바탕으로 집필되었다.


중국 광둥의 어린 소년은 전염병으로 가족을 잃고 ‘러벌’교수에게 구조되어 영국 런던으로 가게 된다. ‘로빈 스위프트’라는 이름을 갖게 된 소년은 광둥어와 만다린어의 언어적 배경 위에 영어, 그리스어, 라틴어 등을 익힌 뒤 옥스퍼드의 왕립번역원에 입학한다. 그곳에서 캘커타에서 온 ‘라미’, 아이티 출신 ‘빅투아르’, 영국의 귀족 아가씨 ‘레티’를 동급생으로 만나 우정을 쌓아간다. 출신과 성장배경이 달랐지만 번역원 말고는 갈곳 없이 고립되었다는 공통된 상황이 이들을 가족같은 끈끈함으로 엮는다. 네 친구는 상상을 뛰어넘는 특권의 수혜자가 되어 꿈 같은 학원 생활을 누리지만, 제국을 유지하고 식민지를 통치하기 위한 수단으로 자신들이 이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면서 갈등에 빠지게 된다.


학교에서 마법을 배우며 교수와 학생, 동료들과의 우정 등 이야기가 전개되는 방식은 해리포터 시리즈를 연상하게 하지만(배경도 같은 영국이다)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약탈적 확장과 그 속에서 고뇌하는 주인공의 갈등은 더 어둡고 매력적으로 읽힌다. “바벨의 부가 어떤 불의에 기반하는지 나날이 분명해지는 이 때에 정작 자신은 바벨에서 성공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는 내적 모순도 해소하기 힘든 문제였다”(1권 p.224) 옥스퍼드에서의 배움과 같은 길을 가는 동료들을 너무나 사랑하지만 번역원으로 대표되는 학계과 제국주의의 유착을 목도하며 로빈과 라미, 빅투아르는 형언하기 힘든 죄책감과 절망을 느낀다. 한편 뼈속까지 영국인인 레티는 그들이 받고 있는 엄청난 혜택에도 불구하고 혁명에 가담하는 친구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독자는 등장인물들의 입체적인 시선을 통해 상황을 재구성하며 그들의 내적 갈등을 마주하게 된다. 작가는 억압과 착취의 순환에 일조하는 지식인이 갖게 되는 자조와 자기혐오, 그리고 그들이 혁명에 참여하며 체제에 저항하는 과정을 면밀하게 직조해낸다.


“우리가 우리의 목소리를 내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번역원이 제공하는 일체의 번역과 실버워킹 서비스를 중단하는 것이다. 이 투쟁은 우리의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이어질 것이다. 이에 우리는 파업을 선언한다.”(2권 p.302) 은을 마련하기 위해 중국에 아편을 팔고 전쟁을 일으키려는 정부에 대항해 로빈과 번역사들은 바벨을 점거하고 투쟁에 돌입한다. 신념을 관철하고 체제에 저항하기 위해 주인공들이 선택하는 길은 현실적이면서도 필연적이다. 쿠앙은 산업혁명과 아편전쟁, 유럽제국의 식민지 형성과정등 역사적 사실을 날실로 하고 실버워킹이라는 마법의 판타지적 요소를 씨실로 한 거대한 태피스트리를 완성한 셈이다.


소설의 미덕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다양한 배경과 성격의 등장인물들과 그들이 처한 현실, 고민은 독자에게 묵직한 존재감을 선사한다. 우아하면서도 활기찬 라미와 영민한 빅투아르, ‘잉글리시 로즈‘로 대변되는 레티의 우정은 청춘의 빛나는 순간을 대변하고 투사가 되기에는 유약했던 로빈이 파업을 이끌며 내리게 되는 결단의 순간은 읽는 이의 마음을 숙연하게 만든다. 언어, 그리고 번역이라는 작업에 대한 작가의 해석 역시 독자에게 지적 유희를 선사한다. “언어는 그저 차이일 뿐이다. 언어는 세상을 바라보는 수천 가지 방식, 세상을 거쳐가는 수천 가지 길이다. 아니, 한 세상 안에 수천 가지 세상이 존재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번역이란, 비록 헛된 노력일지라도, 그것들 사이를 오가려는 꼭 필요한 시도다.”(2권 p.422) 이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게 해 주는 모든 행위에 대한 오마주가 아닐 수 없다. 마치 영화를 보는 듯한 묘사와 속도감 또한 이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게 하는 매력 중 하나다. 사변소설, SF와 판타지를 좋아하면서 지적 충만감을 느끼고 싶은 독자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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