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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마오리 Jul 07. 2023

불안한 현대인의 주위를 떠도는 백색 소음

서평 <화이트 노이즈> 돈드릴로 (2022, 창비) 

‘미국 현대 문학의 거장’으로 불리는 소설가 돈 드릴로의 소설 <화이트 노이즈>(1985)가 최근 넷플릭스에 의해 영화화 되면서 화제가 되고 있다. 1985년 전미도서상을 수상한 이 작품은 ‘거대한 테크놀로지와 인간 문명의 어리석음’에 대해 날카로운 블랙유머로 버무린, 마치 현대의 거대한 재난을 예언하는 듯한 묵시록과 같다.


주인공이자 소설의 화자인 ‘잭 글래드니’는 미국 소도시 블랙스미스의 칼리지온더힐 대학 히틀러 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부인 ‘버벳’과 함께 전 배우자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을 양육하며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삶을 누리고 있다. 어느 날 마을 근처에서 유독물질을 실은 탱크차가 탈선하게 되면서 유독 가스의 공중유출사건이 일어난다. 지시에 따라 피난길에 오른 잭의 가족들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대피소로 피하지만 그 와중에 잭은 ‘나이어딘 D’라는 독성물질에 노출되고 만다. 시간이 지나 가스 구름은 사라지지만 사람들, 특히 잭의 마음에 드리워진 걱정과 근심은 사라지지 않는다. 어느 날 그는 버벳의 숨겨진 약병을 발견하고 출처를 캐기 시작하는데....


현대 미국의 전형적인 삶을 재현한 이 소설은 자본주의, 소비주의, 대중매체와 과학기술, 그리고 죽음과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이 얼마나 사람들에게 깊게 드리워져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 주인공 잭은 히틀러학과의 창시자로 ‘권력과 광기와 죽음이라는 직업상의 아우라’(p.136)를 보장받지만 정작 본인은 죽음의 두려움과 혼자 남는다는 공포에 포획된 상태다. 네 번째 배우자인 버벳과 사랑을 나누면서도 ‘누가 먼저 죽을까?’라는 생각을 끊지 못한다. 한없이 긍정적인 에너지를 가졌고 자신과의 사이에 비밀이 없다고 믿었던 버벳이지만 그녀조차 죽음의 공포를 없애주기 위한 신약개발의 비밀 실험에 참가한다. ‘다일라’라는 명칭의 신약은 삶을 견디기 힘들었던 버벳에게 너무나 절실해 개발 책임자 ‘미스터 그레이’와의 정사까지 불사할 정도였고, 잭 또한 부인의 배신보다도 자신의 공포를 덜어줄 수 있는 약의 존재가 더 중요한 것처럼 보인다. 


작가는 이 모든 혼란과 불안에 대한 구원투수로 신을 호출하게 된 것은 아닐까? 잭은 저먼 타운에서 만난 수녀와 천사, 구원, 믿음과 헌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믿음이 이 세상에서 사라질수록, 사람들은 누군가 믿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그 어느 때보다 더 절실하게 필요로 해요.(중략) 그들은 자신이 믿지 않는게 옳다고 확신하지만, 믿음이 완전히 시들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죠. 믿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가 바로 지옥이니까요.”(p.575) 작가는 신에 대한 믿음을 필요로 하면서도 스스로는 신앙을 갖지 못하는 현대인들에게 촌철살인의 비수를 날린다. 소설의 말미에 버벳의 가장 어린 아들 ‘와일더’는 자신의 세발자전거로 차들이 질주하는 고속도로를 횡단하는 해프닝을 벌인다. 실체가 없는 불안과 두려움으로 고통 받는 어른들에 비해 와일더에게는 실제적인 위험이 닥치지만 정작 그에게는 그 상황이 위험으로 비쳐지지 않는다. 횡단을 마친 와일더는 도랑으로 굴러 떨어져 지나던 운전자에게 구조되는데 어쩌면 우리 삶도 이처럼 사고와 우연, 행운과 불운이 뒤섞여 마주해야만 하는 필연적인 이벤트가 아닐까?


유독가스의 누출로 벌어지는 소도시의 대 혼란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재난 이후 벌어진 모의대피훈련에 잭의 딸 ‘스테피’는 희생자 역할을 자처하고 아들 ‘하인리히’또한 거리 조장을 맡아 훈련에 임한다. “재난이라는 관념에 얼마나 깊숙이 물들어 있는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이것이 바로 이 아이가 내다보는 미래란 말인가?”(p.368) 재난의 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인의 근원적인 두려움을 그럴듯하게 구축해 낸 작가의 필력은 40년 가깝게 지난 지금까지도 서늘하게 다가온다. “활기 띤 정신적 기류와 음험한 번득임이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번져가는 것 같았다. 문제는 이런 것들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일종의 흥분이자 파동이요 전율이었다.”(p.420) 소설이 발표된 이후 발생한 여러 재난 사태를 지나오면서 혹자는 드릴로의 통찰력에 예언자적 권위를 부여하기도 했지만 테크놀로지와 대중매체에 대한 작가의 끊임없는 탐색은 작품을 탄생하게 만든 집필의 강력한 동기일 것이다. 


현대적 소재를 즐겨 등장시키는 돈 드릴로의 작품은 매우 시의적이면서도 오랫동안 읽힌다.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바래지 않은 주제의식은 그가 왜 미국 현대문학의 거장으로 불리는지 알 수 있게 한다. 하지만 문단이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아 장황하게 보이는 서술은 독해에 어려움을 줄 수도 있다. 여러 번의 결혼으로 복잡하게 얽힌 잭과 버벳의 가계도 또한 서사를 따라가는데 장애물로 작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미국 현대문학을 즐겨 읽으며 백색소음처럼 어디서나 우리 주위를 맴도는 불안과 두려움을 직시하고 싶은 독자라면 후회하지 않을만한 선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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