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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마오리 Oct 22. 2023

집요한 연구로 되살린 비평의 천재

<발터 벤야민 평전> 하워드 아일런드, 마이클 제닝스 (글항아리, 201

하워드 아일런드와 마이클 제닝스의 <발터 벤야민 평전>(글항아리, 2018)은 독일계 유대인 비평가이자 철학자인 발터 벤야민(1892~1940)의 생애와 그의 학문적 성취를 촘촘하게 엮은 책이다. 각각 MIT와 프린스턴 대학의 교수로 재직 중인 저자들은 영미권에서 가장 권위 있는 벤야민 연구자들로 알려져 있다. 유럽의 지성사와 문화비평 분야에서 큰 족적을 남긴 벤야민은 ‘유럽 모더니티의 가장 중요한 증인’이자 ‘픽션, 르포, 문화 분석, 회고록 사이를 넘나드는 문장가’였다. 이 책은 벤야민이라는 ‘세계’를 시간 순으로 정리하며 그의 사상과 저서, 삶의 순간들을 세밀하게 파고든다.


책에 의하면 발터 벤야민은 베를린 상층 부르주아에 속하는 유대계 독일 상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유한 가정환경과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는 도시 베를린은 벤야민의 유년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카이저 프리드리히 학교에 취학하지만 병약한 아이였던 그는 하우빈다 전원학교로 옮겨가 교육개혁가인 구스타프 비네켄을 통해 문학과 철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이후 대학에 진학한 벤야민은 학생운동에 투신해 교육개혁에 뜻을 보태고, 대학에서 자신의 연구를 계속하기로 마음먹는다. 스위스에서 <독일 낭만주의 예술비평 개념>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그는 교수자격 취득논문인 <독일 비애극의 기원>을 집필하며 여러 대학의 교수자리에 도전하지만 번번이 거절당한다. 


저자는 벤야민의 생애와 저서를 병렬하며 학자로서의 결과물과 삶의 사건들, 그에게 영향을 미친 지인들의 만남을 날줄과 씨줄로 엮었다. 시대별로 정리된 저서와 사건들, 지인에게 보낸 편지들은 벤야민이라는 학자가 치열하게 성취해 낸 연구의 성과와 평가에서부터 한 인간이 살아가면서 저지르거나 당해야 했던 치부까지 드러내고 있다. 그는 결혼해서 아내까지 있는 상태였지만 노부모의 부양을 받아야 했고, 나치가 집권하며 망명생활을 이어갈 때는 지인들의 도움을 구했다. “어느 곳에 가면 내 힘으로 그곳의 최저 생계비를 벌 수 있고 또 어느 곳에 가면 나도 그곳의 최저 생계비로 지낼 수 있지만, 그 두 가지가 한꺼번에 되는 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p.527) 벤야민은 이성만으로 삶과 행동을 바라보는 사람이었고 공감능력이 부족했다는 평가를 듣기도 했지만 ‘읽고 쓰고 생각할 시간과 공간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안락과 안정과 영전을 포기’(p.13)한 인물이었다고 책은 묘사한다.


벤야민의 인간관계에 대한 탐구 또한 책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아내 도라는 벤야민의 중요한 지지자였으며 오랜 기간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다. 그럼에도 벤야민은 율라 콘, 아샤 라치스 등과 끊임없는 연애관계를 만들었다. 평생 우정을 나누며 학문적인 동반자 역할을 했던 게르숌 숄렘은 벤야민 사후 그의 저작들과 아카이브 등을 보존했던 일등 공신이다. 당대 최고의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와의 교류와 예술가 모호이-너지와의 만남은 사진과 영화, 현대 매체에 대한 벤야민의 관심을 증폭했다. 벤야민에게 계속 연구비를 지급하며 집필을 도운 사회연구소의 호르크하이머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대표 격인 테오도르 아도르노와의 관계 또한 관전 포인트가 아닐 수 없다. 책의 줄기를 따라가다 보면 20세기 초 유럽 지성사의 무대 뒤편을 보는 듯 느끼게 된다. 


책의 가장 큰 미덕은 벤야민의 저작에 대한 소개와 그 배경, 저작이 그의 인생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나아가 비평사에 미치는 영향까지 입체적으로 다루었다는 데 있다. ‘<독일 비애극의 기원>은 비애극이라는, 옛날에 없어졌다고도 할 수 있는 드라마 형식의 역사적 의의를 탁월하게 분석해 낸 저작으로서, 지금은 20세기 문학비평의 대표적인 성취 중 하나로 우뚝 서 있다’(p.316) 150여 페이지에 걸쳐 교수자격 취득논문의 발아과정에서 학계로부터의 거부까지의 과정을 보여주고 그에 대한 의미와 평가까지 정리한 내용은 저작을 통해 벤야민을 접했던 독자에게 작가와 작품에 대한 조감을 가능하게 한다. 


벤야민은 비평을 ‘창조행위의 왕관’으로 보았다. ‘한갓 해석이나 평가에 그치는 경우는 전혀 없다. 그의 비평은 항상 속죄나 구원과 연결되어 있다. 다시 말해, 그에게 비평은 작품의 “파괴”이되 작품 안에 담겨있을지 모르는 진리를 발굴하기 위한 파괴다.’(p.230) 그는 예술작품에 종속된 비평이 아닌, 작품의 “생”을 혁신하고 변형해 ‘사후생’을 시작하게 하는 비평을 펼쳤다고 저자는 역설한다. 당대 문화에 끊임없이 관심을 가진 저널리스트이자 전방위 문화 비평가였던 발터 벤야민의 모든 것이 이 책에 담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방대한 자료조사와 집요한 추적, 학술서를 연상케 하는 빽빽한 편집은 독자에게 부담스럽게 다가올 수도 있겠지만 벤야민에 대해 잘 알고 싶다면 반드시 옆에 두고 볼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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