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 빚진 채 살아간다
기다림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누군가 올 거라는 희망으로 준비하며 깨어 있는 기다림이고, 다른 하나는 아무도 오지 않을 거라는 체념 속에서도 놓지 않는 습관 같은 기다림이다. 나는 그 둘 사이에서 오랜 시간 망설이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말하자면 그들은 모두 문 앞에 등을 켜놓고 있었다. 어느 날, 어쩌면 돌아올지도 모를 그 사람을 위해.
어떤 여인은 작은 기름등을 닦으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가 온다는 약속을 믿었다기보다, 그가 다녀간 적이 있는 이 집이 다시 어두워지는 것이 싫었어요. 그래서 등을 꺼뜨릴 수 없었죠.”
나는 그 말을 곱씹으며 수첩에 옮겨 적었다. ‘어둠을 막기 위한 빛’. 그것은 단지 밝히기 위한 빛이 아니었다. 삶이 흐르는 동안, 우리가 무언가를 기억하고 싶을 때 켜두는 불. 그 불빛 아래서 사람들은 시간을 세고, 거리를 재고, 마음을 들여다본다. 마치 준비라는 말이 어울릴 듯 말 듯한 긴장 속에서 말이다.
어떤 이는 말하길,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르니 깨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종들은 허리띠를 동여매고, 언제든 문이 열리면 바로 나설 수 있도록 준비해야 했다. 어떤 이는 그 시간이 도무지 오지 않아 이제는 등을 끄고 눕고 싶다고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말했던 사람조차도 문을 등지고 완전히 잠든 적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반드시 돌아온다.”
“하지만 언제인지 말해주지 않았잖아.”
“그래서 더 깨어 있어야 해. 도둑은 오겠다고 말하지 않아.”
이런 대화를, 나는 종종 두 사람의 입에서 들었다. 때로는 형제였고, 때로는 스승과 제자였으며, 때로는 같은 자리에 오래 머물러 있었던 낯선 사람들이었다.
사람들은 그가 떠난 시간이 길어질수록 점점 혼란스러워졌다. 주인이 진짜 돌아올지, 혹시 잊은 건 아닌지, 아니면 이 모든 이야기가 처음부터 잘못된 기대는 아니었는지.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질문이 많아졌다. 그런데도 몇몇 사람들은 묘하게 조용했다. 말없이 등불을 닦고, 말없이 자리를 정돈하고, 말없이 어두운 복도를 쓸었다. 그들은 무엇을 믿고 있었을까.
“믿은 게 아니야. 그냥... 그럴 수도 있으니까.”
나는 그 말이 좋았다. 언젠가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확신 때문이 아니라, 그럴 수도 있다는 조용한 가능성. 사람들은 그 가능성을 향해 작은 불을 켜고 있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미뤄두지 않기 위해, 누군가 돌아왔을 때 자리를 비워놓지 않기 위해.
그중엔 이런 이도 있었다. 낮은 담장 안에서 나는 그를 만났는데, 그는 스스로를 '밤을 걸어 다니는 사람'이라 했다. 마을 가장자리에 있는 집마다 등을 확인하고, 길이 막힌 곳은 없는지 살피고, 물이 스며드는 지붕이 있다면 고쳐주는 일을 한다고 했다.
“밤에 이러고 돌아다니면 무섭지 않아요?”
내가 묻자 그는 웃으며 말했다.
“무섭지. 그런데 누군가는 길을 알아야 하잖아. 주인이 돌아올 때 길을 잃지 않게 하려면, 등불 하나라도 더 밝혀져 있어야 해.”
그는 자신의 일을 그렇게 말했다. ‘등불을 밝히는 사람’. 나는 그 말이 마음에 들어 다시 수첩에 적었다. 그리고 혼자 되뇌었다. “등불을 밝히는 사람은 복된 이다.”
나는 누군가에게 들은 예수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주인이 돌아왔을 때, 종이 문 앞에서 깨어 있고 준비되어 있다면, 오히려 주인이 허리띠를 동이고 자리를 마련해 종을 섬길 거라고 했다. 그것은 전복적인 이미지였다. 종이 주인을 기다렸는데, 주인이 오히려 종을 섬긴다니. 마치 서로가 서로의 얼굴을 기억하는 듯한 이야기. 책임과 사랑이 뒤섞이는 지점에서만 가능한 그런 장면.
그 장면이 상상될 때, 나는 누군가가 건넨 말을 다시 떠올렸다.
“그는 문을 두드리지 않을 수도 있어. 그냥 들어올 수도 있어.”
“그렇다면 더더욱 등불은 켜져 있어야겠네.”
그 말속에는 예측할 수 없는 어떤 존재를 향한 존중이 담겨 있었다. 그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사람들. 기다림은 선택이지만, 준비는 태도였다.
나는 어느 날 베드로라 불리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접했다. 그는 예수의 제자였고, 많은 이야기를 들었지만 때로는 그 의미를 곧바로 이해하지 못했던 인물이었다. 어떤 날, 예수는 제자들과 무리 앞에서 주인과 종의 비유를 들려주었다. 그때 베드로는 조용히 물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하신 말씀입니까, 아니면 모든 사람을 향한 겁니까?”
나는 이 질문을 처음 들었을 때, 수첩에 이렇게 적었다.
‘듣는 이는 늘 자기 자리를 묻는다.’
예수는 그 질문에 명확하게 대답했다. 이야기는 모두에게 해당되지만, 더 많이 맡은 사람에겐 더 큰 책임이 있다는 것. 특히 제자들은 주인의 양식을 나눠주는 일을 맡은 사람들. 주인이 없을 때, 대신하여 양식을 나누는 종. 말하자면 부재 중의 대리인. 그 역할은 곧 무게였다.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다른 종들에게 나누어주는 사람. 그 일은 단순히 지혜로운 것만으로는 안 되었다. 충실해야 했다. 실제로 행해야 했다.
나는 그 부분을 들으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의 부재를 살아내는 일은, 그를 기억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종은 주인이 없는 시간에 주인의 마음을 대신해 살아야 했다. 주인의 방식, 주인의 리듬, 주인의 태도. 그것을 기억하고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 안에서 그 마음을 구현해 내는 일.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주인이 돌아왔을 때 기뻐할 만한 일이라는 것을 예수는 말했다고 한다.
그가 돌아왔을 때, 맡겨진 일을 계속하고 있는 사람. 그는 복되다. 그리고 주인은 그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길 것이라고 했다. 나는 이 말을 옮겨 적은 후, 한참 동안 수첩을 덮지 못했다.
복된 사람. 맡겨진 일. 충실함.
이 단어들이 하루 종일 귓가에 맴돌았다. 맡겨진 일이란 무엇일까. 종은 단지 자신의 일이 아니라, 주인의 뜻을 이루는 일을 살아야 한다. 등불을 켜두는 것, 양식을 나누는 것, 주인의 방식대로 다른 이들을 돌보는 것. 나는 그런 사람들을 몇몇 알고 있었다. 이름도 알지 못한 채 스쳐 지나갔지만, 그들의 등불과 손길은 오래도록 내 기억에 남았다.
한 노파가 있었다. 마을 아이들에게 아침마다 빵을 나누어주었다. 그녀는 내게 말했다.
“이건 내 빵이 아니야. 내가 가진 건, 다 그가 준 거니까.”
나는 놀라서 물었다.
“누가 줬는데요?”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그 사람. 나는 아직도 그가 돌아올 거라고 믿어.”
그녀가 건넨 말은 단순한 기대 이상의 것이었다. 삶이 하나의 연장이 되는 시간. 그 사람을 기다리며 자신에게 맡겨진 것을 사용해 누군가를 돌보는 시간. 빵은 사라졌고 아이들은 자랐지만, 그녀가 남긴 ‘양식’은 기억으로 남았다. 그리고 그 기억은 내가 다시 누군가에게 물려주고 싶은 이야기였다.
나는 이 비유가 왜 그렇게도 무겁고 따뜻하게 다가오는지 곱씹었다. 준비된 이에게만 돌아올 수 있는 주인. 그리고 그가 돌아왔을 때, 오히려 섬김을 받는 복된 종. 그것은 기다림의 끝이 아니라, 준비된 관계의 회복이었다. 종은 주인을 위해 깨어 있었고, 주인은 그 종을 위해 자리를 마련한다. 이것이 주인과 종 사이의 전환된 장면이었다.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는 이제 다음 장으로 넘어가야 한다. 하지만 그전에, 내 손에 쥐어진 이 한 문장을 적어둔다.
‘복된 이는, 맡겨진 것을 끝까지 행하는 자다.’
그리고 등불 하나를 그려 넣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깨어 있을 테니까.
그는 어느 날, 불을 던지러 이 땅에 왔다고 말했다. 나는 이 표현을 처음 들었을 때 당황했다. 왜 불이어야 했을까. 불은 파괴와 심판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그 불은 다르게 느껴졌다. 타오르기 위함이 아니라, 살아나기 위한 것이었다. 어둠 속에서 길을 찾게 하는 불, 속을 비추는 불, 그리고 마침내 꺼지지 않는 생명의 불.
나는 이 불이 무엇인지, 그것이 어디에서 시작되어 누구에게 닿는지를 오래도록 묻고 다녔다. 많은 이들이 말했다. 그는 성령의 불을 말한 것이라고. 그 불은 그냥 불이 아니었다. 사람을 안에서부터 변화시키는 어떤 기운, 어떤 생명의 숨결이었다. 누군가는 그 불을 받고 숨이 트였다고 했고, 또 다른 이는 그 불을 거부하다가 길을 잃었다고 말했다.
“그가 우리에게 주려 했던 건 성령이었어. 그리고 그 성령은 곧 불이었지.”
어떤 노인이 내게 속삭이듯 말했다. 그는 그 불이 임했던 장면을 기억한다고 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힘이, 기름 위에 떨어지는 불꽃처럼 한순간 사람들 위에 임했다고.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가슴으로 분명히 느껴졌던 어떤 열기. 그날 이후, 그는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고 했다. 같은 거리를 걸어도, 같은 사람을 만나도, 이전과는 전혀 다른 눈으로 살아가게 되었다고.
그 불은 환영이었지만 동시에 경고였다. 그는 단지 위로하고 감싸는 영을 주려 했던 것이 아니라, 심판의 불을 던지러 온 사람이었다. 성령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는 말이 여전히 마음을 찔렀다. 불은 선택을 요구했고, 그 선택은 곧 심판이었다.
나는 그의 말에서 어떤 긴장을 느꼈다. 그 긴장은 오래전 예언자들이 예고했던 날과도 같았다. 사람들은 ‘여호와의 날’을 기다렸지만, 예언자들은 그날이 어둠과 파멸의 날이 될 것이라 했다. 빛의 도래가 아니라 그림자의 심판. 기대의 날이 아니라 두려움의 날. 그는 분명 그날의 시작이었고, 그 불은 서막이었다.
하지만 그가 불을 던지기 전에 먼저 지나야 할 길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고 했다. 이미 세례를 받은 사람이 왜 다시 세례를 말하는 걸까. 나는 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을 찾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누군가가 조용히 말했다.
“그건 물이 아니었어. 고난이었지. 피와 죽음의 세례. 그가 말한 세례는 그가 감당해야 할 십자가였어.”
그 말이 너무 무겁게 다가왔다. 불을 던지기 위해 그는 먼저 물에 잠겨야 했다. 그것은 삶의 역설이었고, 구원의 조건이었다. 그는 먼저 죽어야만 했고, 그래야만 불이 살아날 수 있었다. 세상에 성령의 불을 보내기 위해, 그는 홀로 고통을 통과해야 했다. 그의 고통은 시작이었고, 그의 죽음은 새로운 불의 문을 여는 열쇠였다.
그는 그것을 괴로워했다. 단지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그 고통이 어떤 의미를 가져야 하는지를 알았기 때문에. 그 고통은 평화를 깨뜨릴 것이고, 사람들 사이를 갈라놓을 것이며, 무엇보다도 가장 사랑하는 이들 사이를 분리할 것이었다. 나는 그의 말을 다시 떠올렸다.
“내가 이 땅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느냐? 아니다. 나는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어쩌면 세상은 그에게서 평화를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다툼 없는 삶, 싸움 없는 가정, 고요한 일상. 하지만 그가 가져온 것은 완전히 달랐다. 그는 선택을 요구했고, 그 선택은 분열을 낳았다. 가장 가까운 이들이 등을 돌리고, 가장 사랑하는 이들이 반대편에 서는 일이 생겼다. 부모와 자식이 서로를 향해 등을 돌렸고,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는 그것을 아프게 바라보았다.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전하려 했던 것은 사람 사이의 조용한 평화가 아니라, 하늘과 연결되는 생명의 불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미가서의 말을 떠올렸다.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 집안사람이리로다.” 복음은 사람들을 살리는 것이지만, 동시에 갈라놓는 힘을 가지고 있다. 누구는 받아들이고, 누구는 외면한다. 같은 밥을 먹는 식탁 위에서, 서로 다른 길이 시작된다.
이해하기 어렵고, 받아들이기 두려운 말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안에서 묵직한 진실을 느꼈다. 그는 세상의 평화가 아니라, 진실을 가져오러 왔다. 그리고 진실은 언제나 관계를 시험한다. 관계 안에 숨어 있던 거짓은 그의 불 앞에서 드러났고, 드러남은 곧 대립을 낳았다.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들 중 어떤 이는 아직도 부모와 말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또 다른 이는 자식에게 외면당한 채 살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들 모두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은 여전히 등을 끄지 않았고, 여전히 성령의 불을 붙잡고 있었다. 가족을 잃어도 진실을 놓을 수는 없었다고 했다. 그것이 고통스러운 구별이고, 불이 가져온 분열의 현실이었다.
나는 이 모든 이야기를 조용히 기록하며 깨달았다. 그는 불을 던졌고, 그 불은 지금도 살아 있다. 분열은 끝이 아니었다. 진실을 향한 시작이었다. 그는 그 길을 먼저 걸었고, 우리에게도 물을 지나 불로 나아오라고 손 내밀고 있었다.
나는 그 손을 보았다. 못이 박힌 손, 물과 피가 흐른 손, 불을 던지기 위해 타오른 손.
그리고 내 수첩 마지막 장에 이렇게 적었다.
“그는 불을 던지러 왔다. 나는 그 불 앞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내가 들은 이야기 중, 가장 짧고도 깊게 남은 장면은 그날 벌어졌다. 그는 더 이상 제자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둘러선 무리에게로 옮겨졌고, 말은 단도직입적이었다. 아무 장식도 없이, 어떤 설명도 붙지 않았다.
“너희는 구름이 서쪽에서 올라오면 비가 올 줄 알고, 남풍이 불면 날이 더울 줄 안다.”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바다에서 오는 구름은 늘 비를 데려왔고, 광야에서 부는 바람은 늘 열기를 실어왔다. 그것은 그들이 살아오며 몸으로 겪은 일이었다.
“그런데 왜 지금 이 시대는 분별하지 못하느냐?”
그 순간, 많은 이들의 얼굴이 굳었다. 그가 말하는 시대는 단순한 연대나 사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느님의 심판이 다가오고 있는 시간, 모든 것의 방향이 바뀌는 흐름의 순간이었다. 그는 분명히 보았던 것이다. 바람이 불기 전 공기의 냄새를 아는 자처럼, 그는 지금 이 땅에 스며들고 있는 심판의 기운을 감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은 보지 못했다. 아니, 그중 상당수는 보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는 말했다.
“왜 너희는 스스로 옳다고 판단하지 않느냐?”
이 말은 회피할 수 없는 책임을 묻는 것이었다. 그는 그들이 이미 무언가를 알고 있음을 전제하고 있었다. 알면서도 외면하는 자들, 스스로 판단할 능력이 있으면서도 남의 말에 기대어 살아가는 자들. 그는 그것을 위선이라 불렀다. 하늘의 구름은 읽을 수 있으면서도, 인생의 흐름은 읽지 못하는 사람들. 그는 그날, 삶과 죽음 사이의 경계를 명확히 나누는 비유를 들었다. 어떤 사람이 원수에게 빚을 졌다. 그리고 그 빚은 갚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그는 말했다.
“너희가 그와 함께 재판장에 갈 때는 도중에라도 화해하라.”
이 말은 단순한 인간관계의 조언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느님께 진 죄의 빚에 관한 경고였다. 사람은 누구나 빚지고 있다. 말로, 행동으로, 무관심으로. 그리고 그 빚은 쌓이기만 할 뿐, 결코 스스로 갚을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재판장이 너를 판사에게 넘기고, 판사가 너를 옥졸에게 넘겨 감옥에 가두게 될 것이다.”
그는 그 이후에 붙였다.
“마지막 한 푼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그곳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나는 이 말의 두려움을 처음에는 단지 심판의 공포로만 이해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두려움 이상의 것이었다. 그는 아직 늦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었다. 재판장으로 가기 전, 여전히 화해의 기회가 있다고. 지금이라면 돌이킬 수 있다고. 그 말에는 긴박함이 있었지만, 동시에 소망이 담겨 있었다. 돌이킬 수 있다는 말은, 대단한 신앙 고백이나 의식이 아니었다. 그저 잊은 척했던 메시지 하나에 답장을 보내는 일, 마주치면 외면하던 이에게 눈인사라도 건네는 일일지도 모른다. 마음의 빚은 그렇게 작게 시작되는 화해로 풀릴 수도 있으니까.
나는 한 여인을 떠올렸다. 이름도 밝히지 않았고, 그저 거리의 끝에서 혼잣말을 하던 사람이었다. 그녀는 내게 말했다.
“나는 빚졌어요. 아주 오래전에. 그런데 나도 그게 뭔지 몰라요.”
나는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그게 죄인가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지도, 부정하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히 말했다.
“누가 내게 화해하자고 말해준 적이 없어요.”
나는 그 말을 듣고 오래전 내게 쌓인 어떤 관계를 떠올렸다. 말 한마디면 풀 수 있었던 감정, 하지만 말하지 않아 오해로 굳어져버린 일. 혹시 ‘화해’는 그런 식의 첫걸음은 아닐까. 용서보다도 먼저, 조용히 내 안의 빚을 들여다보는 일.
그녀의 말은 예수의 비유와 겹쳤다. 사람들은 자신이 죄를 지었는지도 모른 채 살아간다. 아니, 죄라는 개념 자체가 먼 이야기처럼 들린다. 하지만 예수는 그 죄를 빚으로 비유했다. 그 빚은 끝내 누군가의 책임 아래 놓이게 되어 있다. 그리고 갚지 않으면 심판은 피할 수 없다.
예수는 그 말을 무리에게 했다. 누군가의 제자나 종교 지도자가 아닌, 그 자리에 있었던 평범한 사람들에게. 그들에게 남겨진 선택은 명확했다. 흐름을 분별할 것인가, 아니면 여전히 날씨만 바라볼 것인가.
그날 나는 그의 말을 모두 받아 적었다. 그는 하늘의 구름을 읽듯 시대를 보라고 했다. 지금 불고 있는 바람의 방향을 읽으라고 했다. 그리고 죄의 빚을 갚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라고 했다. 그래야 심판대 앞에 서기 전, 그 흐름 안에서 화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말은 언제나 불편했다. 때로는 너무 직접적이었고, 때로는 내 마음 가장 깊은 곳을 건드렸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 불편함이야말로 나를 일으켜 세운 첫 번째 불꽃이었다. 바람의 방향을 감지하듯, 그는 시대의 기류를 읽었고, 사람들에게 물었다.
“왜 지금을 분별하지 못하느냐”라고.
그 물음은 여전히 내 안에서 울린다. 시대를 분별한다는 것, 그것은 단지 예언자를 알아보는 일이 아니라, 내 삶의 흐름을 다시 묻는 일이다.
나는 기다림에 대해 오래 생각했다. 누군가는 등을 켜고, 누군가는 불을 던지고, 또 누군가는 그 불에 타들어가면서도 꺼지지 않는 빛이 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들 사이 어딘가에서 조용히 메모를 남기는 사람으로 남았다. 단지 이야기를 적는 것 같지만, 실은 나도 등을 켜는 중이었다. 삶의 어딘가에 조용히 불을 남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돌아왔을 때, 어둠 속이라도 그 얼굴을 알아볼 수 있도록.
그는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오해받았지만, 실은 진실을 드러내러 왔다. 그 진실은 등불 같았다. 관계를 비추고, 죄를 드러내고, 숨겨둔 빚을 끌어올렸다. 하지만 그 불은 파괴가 아니라 회복의 불이었다. 나는 그 불 앞에서 물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내 안의 흐름은 어디를 향하는가?”
그는 기다림을 선택으로 만들었고, 준비를 태도로 바꾸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기억한다. 물과 피가 흐른 손, 그리고 꺼지지 않는 불을 품은 손. 그 손을 기억하는 이들이 아직도 등을 켜고 살아간다. 그 불빛 안에서 나는 내 자리, 내 시간, 내 방향을 분별해 본다. 그리고 조용히 적는다.
“지금은, 등을 켜야 할 시간이다.”
위의 글은 신약 성경 "누가복음 12:35-59"을 각색해서 쓴 글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성경책을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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