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43 – 다시, 계산하는 자리에서

예수를 따르기 전에 물어야 할 질문

by 나그네 한

사람들은 이유 없이 길을 따라나서지 않는다.

누군가의 발자국을 좇는다는 건, 그 안에 어떤 기대가 깃들어 있다는 뜻이다. 그가 가는 길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 모른 채 따라가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일까. 나는 오래전 어느 날, 수많은 이들이 예수를 따라 걷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 장면이 이상하리만큼 오래도록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날, 그는 갑자기 멈춰 섰다고 했다. 돌아서서 자신을 따라오던 무리들을 바라봤다. 아무 말 없이, 조용히 그들의 얼굴을 살폈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너희가 나를 따르려거든, 너희 부모와 아내와 자식들, 형제자매들, 심지어 너 자신조차도 미워해야 한다."


미워하라. 나는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 한동안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사랑하라는 가르침과는 정반대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말을 전한 이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건 그냥 '미워하라'는 뜻이 아니오. 그가 쓰던 말은, 당시엔 그런 식의 말투였소. 비교를 강조하는 방식이었지. 진짜 뜻은... 다른 어떤 것보다, 누구보다, 예수를 더 사랑할 수 있느냐는 거요."


그 말을 듣고 나는 비로소 이해하기 시작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때로 다른 사랑을 잠시 뒤로 미루는 선택을 요구하기도 한다. 모든 사랑이 충돌하는 자리에서, 어느 하나를 택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너는 무엇을 택할 수 있을지를 묻는 말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몫의 사랑을 쥐고 산다. 가족에 대한 마음, 자존에 대한 애착, 익숙한 삶에 대한 의지. 하지만 그 모든 것을 한 손에 들고선 새로운 길을 걷는 일은 불가능하다. 무언가는 내려놓아야 하며, 무언가는 덜 사랑해야 한다. 아니, 더 사랑하는 쪽으로 향해야 한다.


예수를 따라나섰던 그들은 어쩌면 처음부터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를 따르려면 자신을 부인해야 한다는 사실을. 자신을 버리고서야 비로소 걸을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그는 그런 식으로 말했소."


한 노인이 내게 말했다.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지 않는다면, 그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그 말이 그날 군중들 사이에 어떤 파장을 일으켰는지는 아무도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어떤 이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고, 어떤 이는 고개를 숙인 채 돌아섰다고도 했다. 그럼에도 몇몇은 그를 따라 길을 걸었다. 낯선 도시와 바람 많은 언덕을 지나, 말 한마디 없이 조용히 따라갔다.


그들이 따라간 건 그 사람의 말이었을까, 기적이었을까. 아니면... 그가 품고 있는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단단한 것, 그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나에게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들은 공통으로 말했다. 그 길은 가벼운 길이 아니었다고. 어떤 날은 돌아가고 싶었고, 어떤 날은 그냥 멈춰 서고 싶었다고. 그럼에도 그를 택하는 순간, 그 길 외에는 다른 길이 보이지 않았다고.


그건 아마 ‘자기 부인’이라는 말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걸지도 모른다. 자기를 내려놓고, 자기가 붙들고 싶던 것들을 하나씩 뒤에 두고, 그를 따라가는 길.


그의 길은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었다. 산을 내려가고, 다시 오르며, 사람들이 웅성이는 도시로 들어가는 길. 누군가는 그 길의 끝에서 죽음을 보았고, 누군가는 그 길을 끝까지 따라갔다. 어쩌면 그 길을 따르겠다는 말은, 이미 그 무게를 짊어지겠다는 뜻이었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종종 쉽게 말한다.

"예수를 따른다"라고.

그러나 나는 그 말을 전할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조용히 무너지는 걸 느낀다. 따른다는 건, 남긴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익숙함, 관계, 나, 그리고 삶의 방식. 그 모든 것을 한 줄로 놓고, 단 하나를 더 사랑하겠다고 말하는 일.


그는 자신이 먼저 그 길을 걸었다. 누군가를 위해, 누군가를 덜 사랑해서가 아니라 누군가를 더 사랑하기에,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그렇게 걸어갔다. 내가 만난 이들은, 그 이야기를 조용히 내게 들려주었다.


"그래서 우리도, 그렇게 간 거요."

"하느님보다 더 사랑하는 건, 이제 없으니까."






“그날 그 무리 중 하나는 눈이 반짝였소.”

그를 기억하는 한 남자가 나에게 말했다.


“무언가 크게 결심한 얼굴이었소. 마치 새로운 인생이 열린 것처럼 들떠 있었지. 그런데 그 사람이 이내 사라졌소. 그다음 날도, 그다음 주에도, 다시는 보이지 않았소.”


나는 그 말의 끝에 조심스레 물었다.

"왜였을까요?"

노인은 오래된 생각을 꺼내듯 말문을 열었다.


“가슴이 먼저 앞선 거지. 손은 준비가 안 되었는데 말이오.”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그런 사람들이 많았다. 예수를 본 순간 모든 걸 걸고 싶어 졌다는 사람들. 하지만 삶이란 결코 충동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나중에서야 깨닫게 된 이들. 그날 예수는, 따라오던 무리에게 또다시 입을 열었다고 한다.


"너희 중 누가 탑을 짓고자 할 때,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않겠느냐."


이 말은 생각보다 예리하게 들린다. 처음에는 무언가를 이루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처럼 들리지만, 곧이어 들려오는 말은 차갑다.


‘기초만 놓고 완성하지 못하면, 사람들에게 조롱을 당하게 된다.’


나는 이 구절을 듣고 오래 침묵했다. 예수를 따르겠다고 결심한 이들이 탑의 기초만 놓고 멈춘 채, 떠나갔다는 이야기를 수없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따라갔지요.”

“믿으면 된다고 했으니... 뭐라도 바뀔 줄 알았어요.”


그 말을 남기고 돌아선 이들이 얼마나 많았던지. 예수는 아마 그것을 보았던 게 아닐까. 길을 나서기 전, 비용부터 따지라고 말한 건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적이 만 명인데 내가 가진 병사는 오천. 그럼 어떻게 하겠느냐?”


예수는 탑만이 아니라 전쟁의 비유까지 꺼내 들었다. 내가 만난 사람들 중 어떤 이는 그 말을 들으며 웃었다고 했다.


“그분은 항상 뼈를 때렸지요.”


예수는 현실을 외면하는 감정의 신이 아니었다. 오히려 가장 구체적인 인간의 판단과 결정을 요구했다. 가능한지, 감당할 수 있는지,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내 안에 어떤 자원이 남아 있는지를. 나는 이 말들이 단지 경제적 의미에서의 ‘비용’만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보다는 자존심, 체면, 자기 확신, 혹은 과거의 경험 같은 보이지 않는 자원들이었다.


"그래서요, 결국은 그 말을 했지 않소.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한 중년 여인이 조용히 말했다. 나는 다시금 물었다.


“정말 모든 걸 버렸습니까?”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아니오. 그렇지만, 버리려 했던 적은 있었어요. 그때 조금 자유로워졌죠.”


그녀는 이어서 말한다.

“그분이 말한 ‘모든 소유’는 단지 집이나 밭이나 돈이 아니라, 마음속에 움켜쥔 것들이었어요. 나는 내 이름을 놓기 어려웠고, 어떤 자리, 내 사람들 앞에서의 평판... 그게 나를 꽁꽁 묶고 있었어요.”


그녀는 말끝을 흐리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그런 것들을 놓으니, 그 사람을 따라갈 수 있게 되더라고요.”


내가 만난 이들은 그렇게 말했다. 예수를 따른다는 건, 삶의 계산서를 다시 써야 하는 일이라고. 원가를 따져 묶인 마음의 빚을 갚고, 남은 걸로는 자유롭게 걸을 수 있도록. 제자도가 무모한 결단이 아니라는 사실은, 그들의 얼굴에서 읽을 수 있었다. 그들은 가벼워지기 위해 무언가를 버렸고, 돌아가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묶는 끈을 잘랐다. 어떤 이는 말했고,

“예수를 택하겠다는 결심은 ‘충동’이 아니라 ‘채무 정리’ 같은 거였소.”

그리고 덧붙였다.

“그 결심을 매일 해야 하니까.”


나는 그 말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예수를 따른다는 건, 한 번의 감정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었다. 매일 새롭게, 자신이 걸을 수 있는 무게를 계산하는 일. 매일 조금 더 내려놓고, 조금 더 자유로워지는 일. 그렇게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일.







나는 이전에 들었던 그 사람의 이야기가 다시 떠올랐다. 처음엔 누구보다 열정적이었다. 예수를 따르겠다고 말했고, 남들보다 먼저 발을 내디뎠다. 그 눈빛에는 두려움보다 기대가 컸고, 입가엔 결심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사라졌다. 기초만 놓고, 끝내 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처럼.


“그 사람 말이지...”


당시 함께 걷던 이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그는 처음엔 뜨거웠소. 누구보다 빠르게 뛰어나갔지. 하지만 오래가지 못했소.”

나는 물었다.


“왜요?”

그는 한참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맛을 잃었지.”


그 말은 곧바로 이어지는 예수의 말과 겹쳐졌다.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하겠느냐.”


나는 그 말을 되새기며, 마음속에서 어떤 그림을 떠올렸다. 무언가를 시작한 이가 있었다. 탑을 쌓기 시작했다. 자신이 가진 것을 계산하지 않고, 흥분과 감정으로 올라갔다. 기초를 놓고 나면 탑은 하늘을 향해 올라갈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중간에 멈췄고, 결국 그 자리는 빈 구조물만 남았다.


그와 같은 사람들이 있었다. 예수를 따르겠다고 입술로 고백했지만, 마음은 이미 다른 곳을 향한 사람들. 그들의 말은 뜨거웠지만, 삶은 식어갔다. 매일의 포기, 계속되는 자기 부인이 그들을 지치게 했다.


소금이란 본래, 그런 자리에서 역할을 한다. 맛을 더하고, 부패를 막고, 변화를 견디는 것. 그러나 그 본질을 잃으면, 그저 흙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말한 건 그거요."

한 사람이 말했다.

“예수를 따르겠다는 말은, 그냥 길을 걷는 일이 아니오. 그 길을 끝까지, 그리고 같은 맛으로, 버텨가는 거요.”


나는 또 다른 이를 만났다. 그는 예수를 따르다 말없이 돌아선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기초만 놓고도 만족했지. 사람들이 ‘멋지다’고 말해주었으니. 하지만 맛을 낸 건 아니었소. 그들이 짜야했던 건 말이 아니라, 삶이었는데...”


예수를 따르겠다는 결단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건 시작일 뿐이고, 진짜는 그다음이다. 그다음에서, 사람은 진짜로 자신을 내어줘야 한다. 포기해야 하고, 낮아져야 하고, 매일같이 자신이 가진 것을 다시 내려놓아야 한다. 그래야 짠맛이 유지된다.


맛을 잃은 소금은, 아무 소용이 없다. 그건 그저 모양만 남은 껍데기일 뿐이다. 누군가 말했듯,


“그는 지금도 제자라고 말하지만, 그의 삶에선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소.”

그런 말이 더 이상 듣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점이, 오히려 더 큰 아픔이다. 예수가 마지막에 말했다는 말이 있다.


“그 소금은 땅에도, 거름에도 쓸 수 없다. 결국은 내버려진다.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으라.”


이 말은 단지 경고가 아니다. 그는 우리에게, 끝까지 짠맛을 간직할 것을 요청했다. 처음의 결단이 아니라, 그 결단을 지켜내는 꾸준함.


매일 조금씩 줄어드는 자기 자신.
그것이야말로 짠맛의 본질이라는 것을.


나는 지금도 가끔 그 기초만 놓았던 사람을 떠올린다.

만약 그가 계속해서 자신을 덜어냈다면,
그 탑은 완성됐을까.
그의 삶은 어떤 짠맛을 남겼을까.




위의 글은 신약 성경 "누가복음 14:25-35"을 각색해서 쓴 글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성경책을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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