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44 – 셈할 수 없는 가치

왜 어떤 존재는 다시 돌아오는 순간 모든 걸 바꾸는가

by 나그네 한

사람들이 그를 찾아왔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자리를 잡기도 전에, 이미 둘러선 무리의 눈초리는 날이 서 있었다. 하지만 그는 막지 않았다. 단 한 마디의 질책도, 한 손짓의 거절도 없었다. 오히려 그는 그들을 향해 한 걸음 물러서서 자리를 내주었다. 세리들과, 죄인들. 낯설지 않은 얼굴들.


그들의 걸음은 조심스러웠다. 먼 길을 돌아서 왔다는 듯,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 옆 사람과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옷자락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이따금 사람들의 입술이 움직였다. 누군가는 들릴 듯 말 듯 말했다.


“왜 또 저런 자들이야.”
“구제불능이지.”
“거길 왜 가는 건데?”


유대의 전통은 명확했다.

“악한 자와 교제하지 말라.”

율법을 따르는 이들에게는, 죄인과 가까이 서는 것조차 부정한 일이었다. 그들과 함께 있는 자는 정결을 잃는다고 여겨졌고, 함께 앉아 음식을 나누는 일은, 스스로를 더럽히는 행위라 판단되었다. 그런 시선들이 그들을 둘러쌌다.


그 소리들이 어쩌면 더 많은 발걸음을 포기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그를 향해 조심스럽게, 아주 천천히 걸어왔다. 마치 허락을 구하듯. 어떤 이는 침을 꿀꺽 삼키며, 어떤 이는 숨을 고르며, 그렇게 한 발씩 내디뎠다.


그들은 왜 그렇게까지 하며 다가왔을까.
단순히 말씀이 궁금해서였을까.
어떤 이들은 그 말이 자신을 뚫고 지나가는 느낌이었다고 했다. 어떤 이는 그 말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무너져 있는지를 처음 깨달았다고 했다. 어떤 이에게는 그것이, 처음으로 자신이 사람으로 불린 순간이었다고도 했다.


“그 사람은요,”

한 노인이 말했다.

“듣기만 하는 게 아니라, 듣고 계셨어요.”

“어떻게요?”

내가 물었다.

“그냥... 우리를 보면서 듣고 있었어요. 한 사람이 말할 때, 다른 말도 들리겠지만 그 사람만 바라보는 거예요. 그 순간, 세상이 사라진 것 같았어요.”


나는 그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들은 그냥 용기를 낸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그들의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들어줄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왔던 것이다. 그것은 설명하기 어려운 종류의 신뢰였다. 그가 식사를 하던 자리에 그들이 함께 앉았던 날도 있었다. 그날은 훨씬 더 많은 말들이 뒤를 따랐다. 아니, 비난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분명히 못마땅한 얼굴로 말했다.


“저 사람 좀 봐. 죄인들을 환영하고, 같이 음식을 먹고 있어.”


당시 식사는 단순한 끼니가 아니었다. 함께 앉아 먹는다는 건, 누군가를 받아들였다는 표시였다. 율법을 지키는 이들에게는 충격이었다. 죄인들과 식사하는 행위 자체가 정결 예법을 무너뜨리는 일이었기에, 그들의 눈엔 예수의 행동이 그 자체로 종교적 질서에 대한 도전처럼 보였다. 내가 만난 한 율법학자는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정결 예법을 안 지키는 건 차치하더라도, 최소한 사람을 가려야지. 저런 이들과 식사하는 건 자신도 더럽혀지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나?”


나는 조용히 물었다.

“그 사람들은 오히려 그와 함께한 후 변화되었다고 하던데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인상을 쓴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꺼낸 말이 율법의 정당성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면, 내 질문은 무언가 더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지 않은가에 대한 물음이었다. 그날 그의 말을 들었던 한 여인은, 조심스럽게 내게 속삭였다.



“나는 스스로 죄인이라 생각했어요. 정말 아무것도 아닌 사람. 그런데요, 그 사람은 나를 그냥 사람으로 불렀어요. 그게 다였어요. 그런데도... 뭔가가 바뀌었어요.”


사람들은 왜 그에게 다가갔는가. 스스로 부족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고, 비난하고, 심지어 존재 자체를 혐오했을 때조차 그는 그 자리를 비우지 않았다. 그리고 한마디 했다.


“들어라.”


그것은 명령이 아니라 초대였다. 사람들은 들을 수 있었고, 그는 들을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했다. 그 자리엔 조건이 없었다. 오직, 듣고자 하는 마음만이 있었다. 그러나 모두가 그 말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특히 스스로 의롭다 여긴 자들은 그를 이상하게 여겼고, 그의 주변을 시끄럽게 만들었다.


그들은 말보다 규칙을, 사람보다 정결을 중요하게 여겼다. 예수의 곁에 앉은 자들의 이력이 아니라, 그들의 상태가 공동체를 더럽힌다고 믿었다.


나는 생각했다.
스스로 죄인이라 여긴 이들은 그에게 가까이 갈 수 있었다. 스스로 의인이라 여긴 이들은 그를 멀리하며 판단했다.

누가 더 가까이 있었던 걸까.

그는 단 한마디도, 스스로를 변호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이후, 그는 하나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예수는 조용히, 하나의 이야기를 꺼냈다.


“너희 가운데 누가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중 하나를 잃었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사람들은 말을 멈췄다. 그가 들려주려는 이야기가, 단지 상상이 아니라 자신들을 향한 설명이라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아흔아홉 마리를 들판에 그대로 둔 채, 잃은 양을 찾아 헤매지 않겠느냐?”


그 말은 사람들 사이에 조용히 파고들었다.
그는 지금, 왜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지를 말하고 있었다. 비유라는 방식으로...


목양은 베들레헴 동쪽의 광야 언덕에서 흔하게 이루어졌다. 그곳에서 양들은 험한 길을 따라 목자를 따랐고, 그중엔 언제나 연약한 양이 있었다. 다른 양들과 보조를 맞추지 못하고 조금씩 뒤처지던 양. 스스로 길을 나선 게 아니라, 약해서 무리에서 떨어져 나간 한 생명...


목자는 그걸 안다.
누가 천천히 걷는지,
누가 오늘따라 조용한지를.


그래서 그는, 잠시 아흔아홉을 광야에 두고 그 연약한 한 마리를 찾으러 나선다. 아흔아홉을 울타리 안에 두지 않은 채, 그저 ‘잠시’ 두고 떠나는 건, 지금은 이 하나가 더 위급하다는 걸 그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시선은 사라진 방향을 좇는다.


가파른 경사, 돌무더기, 풀숲. 양이 걸어갔을 법한 흔적들을 따라간다. 모든 것이 조용한 가운데,
그는 귀를 기울인다.


“메에...”

희미한 울음소리.
그 작은 소리에,
목자의 발걸음이 빨라진다.

그리고 마침내,
그 양을 찾는다.

떨고 있거나, 주저앉아 있거나, 혹은 눈을 감고 있는, 그 양을... 목자는 한참 동안 말이 없다. 꾸짖지 않는다. 왜 늦었느냐고 묻지 않는다. 그저 조심스럽게 다가가 양을 어깨에 멘다. 걷게 하지 않는다. 다시 길을 잃지 않게 하려고... 지쳐 있는 걸 알기 때문에...


목자는 스스로 무사히 돌아올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끝까지 메고 간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그는 속도를 늦추지 않는다. 무리로 돌아가고, 함께 울타리 안으로 들어간다. 그곳엔 아흔아홉 마리가 있고, 지금, 그 하나가 더해졌다. 그리고 그는 문 앞에서, 숨을 고른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을 부른다.


“자, 같이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양을 찾았습니다!”


그는 혼자 기뻐하지 않는다. 양의 회복은 공동체의 기쁨이기 때문이다. 이건 단지 ‘내가 다시 찾았다’가 아니다. ‘이 아이가 다시 우리 안에 들어왔다’는 선언이다. 예수는 말을 맺으며 말했다.


“잘 들어두어라. 이와 같이,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을 하늘에서는 더 기뻐할 것이다.”


그 말은 단순한 비교가 아니었다. 하늘의 기쁨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주는 말이었다. 스스로 의롭다 여겨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믿는 자들, 그들이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었다. 그들은 하늘의 기쁨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돌아오는 한 사람의 눈빛 속에서, 하느님이 얼마나 오래 기다리셨는지를 깨닫지 못한 이들.


하지만, 죄인이 돌아오는 그 순간을 지켜보는 사람은 그 자리를 통해, 하늘나라의 잔치가 시작되었다는 걸 알게 된다.


나는 문득, 그 어깨에 실린 양이 우리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흔아홉보다 하나가 더 기뻐진다는 것, 그것이 하늘의 셈법이다.”


그 셈법은, 약해서 떨어진 자를 기억하는 하느님의 마음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또 어떤 여자가 은전 열 닢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중 하나를 잃었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그 말에 몇몇 사람의 얼굴이 멈칫했다. 한 여인의 일상을 떠올렸을 것이다. 낮부터 밤까지 일하느라 굳은살이 박인 손. 어쩌면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어떤 여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이어 말했다.


“그 여자는 등불을 켜고, 온 집안을 쓸며, 그 돈을 찾을 때까지 샅샅이 뒤진다.”


열 드라크마.
그 여인이 가진 돈이었다.
단지 동전 열 개가 아니라, 그녀가 노동으로 하나하나 모아 저축해 둔 생계의 자산. 드라크마는 데나리온과 동일한 가치... 노동자 한 사람의 하루 품삯... 하루, 또 하루를 버텨내며 그녀는 이 돈들을 가족과 내일을 위해 아껴두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사라졌다.


단순한 분실이 아니었다. 앞으로 필요한 삶의 일부를 잃은 것. 그녀는 마음이 급했다. 조용히 불안이 번졌고, 동전을 찾을 때까지 멈출 수 없었다. 그녀는 등불을 켰다.


어둠은 걷혔고, 그 작은 빛 아래에서, 그녀는 온 집안을 샅샅이 쓸기 시작했다. 모퉁이의 먼지를 털고, 장식장 아래를 들춰보고, 낡은 담요 밑도 확인하고, 바닥의 틈새까지도 빛을 들이밀며 뒤졌다.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그 동전을 찾았다. 아무도 보지 않는 가운데 혼잣말을 중얼이며 손으로 들어 올렸을지도 모른다. 그 조용한 방 안에서, 그녀는 안도했고, 기뻐했다.


동전은 다시 제자리에 돌아왔고, 그녀의 저축은 다시 온전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기쁨을 혼자 간직하지 않았다. 그녀는 친구들을 불렀다. 이웃들을 불렀다.


“자, 같이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은전을 찾았습니다!”


이 기쁨은 단순히 동전 하나를 되찾은 것만이 아니었다. 잃어버렸던 밑천이 회복된 것. 그것은 다시 삶을 이어갈 힘이 되었다. 그리고 그녀를 잘 아는 이웃들과 친구들은 그 동전이 어떻게 모아진 것인지 알았기에 그 기쁨에 함께했다.


나는 그 여인을 상상했다.
작은 등불을 든 채,
엎드려 먼지를 쓸며,
숨을 참아가며 바닥을 훑던 모습.

그녀의 손끝에서,
하루의 품삯이 아니라,
하느님의 기쁨 하나가 다시 회복되고 있었다.


그가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분명했다.
잃어버린 동전처럼,
사람 하나가 사라졌을 때
그가 어떻게 찾는지를 말해주기 위함이었다. 그것은 단지 ‘찾는’ 것이 아니라, 삶을 다시 온전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멈추었다. 이야기의 시작은 단순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


작은 아들이 말했다.

‘아버지, 재산 중에서 제게 돌아올 분깃을 주십시오.’


그 말은 말 그대로였다. 그는 자신의 권리, 자유, 감정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의 권리나, 무엇보다 아버지의 감정엔 냉담하고 무감각했다. 그는 이미 마음이 떠나 있었다. 재산을 요구한 뒤, 아버지의 품을 떠나 가족과 동족, 나라로부터도 멀어졌다. 그것은 단순한 이민이 아니라 하느님의 백성으로서의 질서와 법을 버린 것이었다.


아버지는 상처를 입었다. 자식에게 무시당하는 일. 하지만 그는 기꺼이 자신의 재산을 내어주었다. 그 순간, 그는 말없이 사랑을 선택했다.


작은 아들은 먼 고장으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했다. 가족도, 율법도, 질서도 더 이상 그의 걸음엔 영향을 주지 않았다. 그는 방탕한 생활을 했다. 재산이 줄어드는 것도 몰랐다. 법의 테두리를 벗어난 사람은, 자신의 미래에 무감각해질 수 있다. 그는 지금의 달콤함에 빠져 무엇이 사라지고 있는지 느끼지 못했다.


그러던 중, 돈이 떨어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고장에 심한 흉년이 들었다. 이제는 돈도 없고, 일자리도 없었다. 그는 알거지가 되었다. 살기 위해 그는 그 고장의 어떤 사람의 집에 더부살이를 하게 되었다. 주인은 그를 농장으로 보내 돼지를 치게 했다.


이스라엘 사람에게 있어 돼지는 부정한 짐승이었다. 그는 지금, 자신의 생명 부지를 위해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배가 고팠다. 그는 돼지가 먹는 쥐엄나무 열매라도 먹고 싶었다. 그러나, 그에게 먹을 것을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돼지보다 더 비참한 자리에 있었다.


지금 이 순간, 그는 단지 가난한 나그네가 아니었다. 하느님 백성으로서 가장 치욕적인 상태에 놓여 있는 자였다.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그는 중얼거렸다.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많아서 그 많은 일꾼들이 먹고도 남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게 되었구나.’


그는 아버지를 떠난 것을 후회했다. 아버지와 함께했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곳에서의 보호는 과거엔 올가미 같았지만, 지금은 은혜의 공간이었다. 그는 결심했다.


‘어서 아버지께로 돌아가자.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품꾼으로라도 써주십시오.’


그는 자신의 죄를 깊이 자각했다. 죄를 깨달은 사람의 특징은 어떠한 방법으로든 죗값을 치를 각오가 되어 있다는 것... 그는 ‘아들이 아니라 품꾼으로 살아도 좋다’고 여겼다. 그의 죄에 대한 최선의 갚음이었다.


그는 마침내 그곳을 떠나 아버지의 집으로 향했다. 고향으로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떠날 땐 가벼웠고 기대에 찼던 길. 하지만 돌아오는 길은 무겁고, 슬펐고, 부끄러웠다. 집이 보일 무렵, 멀리서 누군가가 달려왔다.


그의 아버지였다.

그는 멈췄다.
당황스러움이 컸다.
하지만 아버지는 말없이 그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아버지는 그가 돌아오기만을 집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재산을 다 써버리고 돌아올 것도, 비참한 모습으로 나타날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들은 말했다.


‘아버지, 저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저는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는 변명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죄를 하느님께, 그리고 아버지께 정직하게 고백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율법을 어긴 죄... 하느님 앞에서의 잘못... 그 모든 것을 담아 아무 말 없이 죄를 고백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의 고백에 어떤 판단도, 꾸중도 하지 않았다.


“어서 제일 좋은 옷을 꺼내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을 신겨주어라.”


좋은 옷은 명예의 표지.
반지는 권위.
샌들은 자유인의 표지.

즉, 그는 아들을 신분적으로 완전히 회복시킨 것이다.

종이 아니라,
다시 아들로.

그는 말했다.

“죽었던 내 아들이 다시 살아왔다.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았다.”


그리고 성대한 잔치가 열렸다. 그 잔치는 온 마을이 알 수 있도록 벌어졌다. 그는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은 것이 무엇보다 기뻤다.


그러나, 그 시간에 밭에 나가 있던 큰 아들이 돌아왔다. 잔치 소리를 듣고 묻자 하인이 말했다.


“아우님이 돌아오셨습니다. 주인께서 무사히 돌아오신 걸 기뻐하시며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큰 아들은 잔치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분깃을 아직 완전히 받지 못한 상태였다. 아버지가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은 밭에서 일하며 아버지를 섬기고 있었다. 그는 화가 났다. 잔치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버지를 모욕하는 행위였다.


아버지는 직접 나와 그에게 말했다.

“들어오너라.”


그 모습은 예수가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먼저 배척하지 않으셨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큰 아들은 무례하게 아버지에게 대답했다.


“저는 아버지의 명령을 어긴 일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에게 빠져 아버지의 재산을 다 날려버린 ‘이 아들’에게는 잔치를 베푸시다니요!”


그는 ‘동생’이라 하지 않고 ‘이 아들’이라 부른다. 형제임을 부정하는 말이었다. 아버지는 말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모두 네 것이 아니냐?”


그 말은 큰 아들의 지위가 여전히 확고함을 확인해 준다.


“그런데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왔고, 잃었다가 다시 돌아왔다. 이 기쁜 날을 어떻게 즐기지 않겠느냐?


아버지는 큰 아들에게 교정한다. 아버지는 네게 빚진 것이 없고, 오히려 지금은 함께 기뻐할 시간이라는 것... 그는 큰 아들이 돌아온 동생을 자기 동생으로 받아들이길 원했다.


그날, 아버지는 둘 다 기다리고 있었다. 돌아올 작은 아들과, 들어올 큰 아들. 그는 하나도 잃지 않으려는 사람이었다.







한 장의 이야기 속에서, 그는 세 번 같은 말을 반복했다.

잃은 것을 찾았다.
그리고 기뻐했다.

어떤 이는 잃은 양을 어깨에 메고 돌아왔고, 어떤 이는 잃은 동전을 들고 이웃을 불렀다. 또 다른 이는 돌아온 아들을 껴안고 잔치를 벌였다.


양은 길을 벗어났고,
동전은 구석에 숨어 있었고,
아들은 스스로 집을 떠났다.

그들의 사연은 달랐지만, 그들을 기다리는 마음은 같았다.


나는 이 세 이야기를 들으며 오랜 시간 침묵 속에 머물렀다. 이야기 속 인물들은 누구 하나 특별하지 않았다. 그들은 실수하고, 잃고, 무너졌으며 그저 다시 돌아올 수 있기를 바라는 이들이었다. 그들을 기다리는 사람은 크게 외치지도, 소리 내어 요구하지도 않았다.


다만, 기다렸다.
조용히,
길 위에 서서,
문가에 등을 기댄 채.

누군가를 찾는다는 건
시간과 체력을 쓰는 일이 아니라, 마음을 다 내어주는 일이라는 걸 나는 이 이야기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잃은 양은 그저 걷는 게 느렸을 뿐이었다. 목자는 그 느림을 놓치지 않았다. 다시 찾았을 때, 그는 그 양을 질책하지 않고 어깨에 조심히 메었다.


등불 아래 먼지를 털며 동전을 찾던 여인은 밑천의 일부를 되찾은 듯 안도했다. 누구보다 자신이 그 돈을 어떻게 모았는지 알기에, 그녀의 기쁨은 혼자만의 것이 될 수 없었다.


그리고, 아버지를 떠났던 아들은 뒤늦게야 보호받던 자리를 그리워했다. 그는 돌아왔고, 아버지는 기다렸다는 듯 그를 다시 존엄한 사람으로 회복시켰다.


세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이들은 한결같이 묻지 않았다. 왜 그랬냐고, 무엇이 문제였냐고... 책임도, 계산도, 벌도 없었다. 그들이 먼저 꺼낸 말은, “함께 기뻐하자”였다.


나는 종종 묻는다. 한 사람이 얼마나 소중해야 그를 찾기 위해 양 떼를 남겨두고, 방안을 쓸고, 문밖에 매일같이 서 있을 수 있을까.


세상은 때로 잘 걷는 사람만을 기억하고, 넘어진 이는 빨리 지워버리려 한다. 하지만 이 이야기 속의 사람은 한 번도 누군가를 포기하지 않았다.


지금껏 들은 이야기 중에서 이토록 조용한 감동을 주는 이야기는 없었다. 단순하지만 깊고, 작지만 무너지는 마음을 일으킨다.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이 누구인지 설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무엇을 기뻐하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한 사람이
되돌아오기를.
다시 살아나기를.

그리고
함께 기뻐할 수 있기를.

그게 전부였다.


어떤 사람은 끝내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 길을 잃은 줄도 모른 채 점점 더 멀어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그를 기억하고 등불을 켜고 기다릴 것이다.


그가 말한 ‘기쁨’은, 누군가 돌아왔을 때 시작된다. 하지만, 그 기쁨의 뿌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를 기다려온 시간이었다.


나는 글을 덮으며,
한 마리의 양,
한 닢의 동전,
그리고
돌아오는 아들을
마음속에 차례대로 떠올렸다.


그 모든 것을 향해
아무 소리 없이 문을 열고 기다리는 사람.

어쩌면,
그를 안다는 건
그 기다림을 닮아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위의 글은 신약 성경 "누가복음 15:11-32"을 각색해서 쓴 글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성경책을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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