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45 – 불완전한 장부, 완전한 선택

사라진 숫자들 사이, 누군가를 품은 사람

by 나그네 한

이야기를 들은 건 아득히 먼 도시의 오래된 상인에게서였다. 종이 바스락이는 소리만 가득하던 작은 서고에서 그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 문진처럼 자리 잡은 손끝이, 한 장 한 장, 문서를 넘기던 그 순간에도 그는 쉼 없이 말했다.


“그 청지기 말이지... 그는 누구보다 계산이 빠른 자였소. 하지만 이상하게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은 건 셈법이 아니었소.”


이야기는 부유한 상인과 그의 청지기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청지기는 원래 믿을 만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처음엔 그랬을 것이다. 아니, 최소한 그런 척은 잘했을 것이다.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고, 계약을 맺고, 거래의 장부를 정리하는 일이 그의 손을 거쳐 갔다. 그는 말하자면, 주인을 대신해 움직이는 손이었고, 그 손끝에서 이익이 오가고 손실이 생겼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그 손이 주인의 뜻이 아닌, 자신의 이익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장부는 복잡했고, 이익은 오리무중이었다. 거래 내역에 의문이 생기고, 이익이 사라진 자리엔 기묘한 공백이 남았다. 결국 주인은 결단을 내렸다. 청지기를 불러, 더는 그의 이름으로 어떤 일도 하지 말라며, 모든 장부를 정리해 돌려놓으라고 명했다.


그 순간, 청지기는 벼랑 끝에 선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가 가진 힘은 전적으로 ‘주인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그것이 사라진다면 그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삽질은 못 해. 손이 익숙하지 않아. 구걸은 자존심이 상해. 사람들이 나를 뭘로 보고...”


그의 속마음은 아마 이렇게 흘러갔을 것이다. 그 자리에 앉아 익숙한 펜을 쥔 손, 번쩍이는 인장을 찍던 습관. 그 모든 것이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권한의 시간과 함께 꺼져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마지막까지 남은 시간의 조각을 쥐고 다시 장부를 펼쳤다. 그가 했던 일은 단순했다.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불러 모아, 그들의 채무 문서를 다시 쓰게 했다. 기름 오십 말이던 것을 사십으로, 밀 백 섬이던 것을 팔십으로...


그는 그들에게 물었다. ‘얼마요?’ 그들이 대답하면, 그는 조용히 말했다. ‘이리 쓰시오.’


무언가를 속이려는 음흉함이라기보단, 누군가를 붙잡으려는 절박함이었다. 이제 그들에게 은혜를 입힌 셈이 되었고, 그는 그 대가로 무엇을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빚을 줄여주었으니, 나중에 나를 기억해 달라고... 내 이름을 어딘가에 남겨달라고...


놀라운 건, 그 모든 일을 지켜본 주인의 반응이었다. 분노도, 질책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 청지기의 마지막 셈법을 인정했다. 부정직했던 삶의 마지막에, 묘한 통찰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재산을 자기 손에 쥐는 대신, 그 재산을 나누었다. 뭔가를 움켜쥐는 것이 아니라, 내어주는 방식으로 자신의 살길을 마련했다. 주인은 그 셈법을 이해했다. 아니, 그 계산 속의 처절한 통찰을 알아봤다. 살아남기 위한 필사적인 판단이었고, 그 판단은 이기적이면서도 의외의 방식으로 다른 이들의 숨통을 틔워주었다.


“이상하지 않소?”


서고 안 상인은 문득 고개를 들며 내게 물었다.


“그 자는 결국 부정직한 자였지. 하지만 그 마지막 결정 하나로 사람들에게 다른 방식으로 기억되었소. 살기 위해 한 일이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누구에게는 숨 쉴 여유가 되었고, 누구에게는 한 번도 받지 못한 호의였던 거요.”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부정을 통해 긍정이 남겨지는 기묘한 역설. 주인의 이익을 해친 자가 오히려 누군가의 삶을 가볍게 만들어주었다는 그 아이러니. 마치, 무너져 가는 것 속에서 이상하게도 길이 열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기억하건대, 예수는 이 이야기를 제자들에게 조용히 들려주었다고 했다. 바리새인들이 듣는 자리에서가 아니라, 그를 따라다니던 이들에게만 조심스럽게.


“세상의 아이들이 서로 살아남기 위해 셈하는 방식이, 오히려 빛을 아는 사람들보다 더 현명한 법이야.”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처음엔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 속엔 어떤 묘한 진실이 숨어 있었던 듯하다.


부정직하되,

외면하지 않은 사람.
탐욕스럽되,

나누어 본 사람.
버림받았으나,

마지막 순간엔 누군가를 품은 사람.


그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가 남긴 건 아주 컸다.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그의 마지막 장부 정리는 계산이 아니라, 남겨진 것들과의 화해였는지도 모른다고.


나는 그 이야기의 끝에서 한동안 침묵했다. 장부를 조용히 닫던 상인의 손이 멈춘 채로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청지기의 셈법은, 단지 살아남기 위한 계산만은 아니었다는 거겠지요?”


그는 짧게 웃었다.
“살려고 한 거였지.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었소. 그가 남긴 것은, 단지 자기만을 위한 도피처가 아니었소. 어쩌면... 누군가의 마음 한 칸을 얻은 셈일지도 모르지.”


그 말은 오래도록 내 안에 머물렀다. 남겨진 삶. 내어주는 계산. 빚을 탕감받은 자들이 그를 기억해 주는 미래그 순간, 예수의 말이 겹쳐 들려왔다.

“세상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라. 그러면 그것이 사라질 때, 너희는 초대받게 될 것이다.”


그것은 이상한 권면이었다. 부정직한 재물, 온전치 못한 수단, 불순한 자산. 그러나 예수는 오히려 그것조차 잘 사용하라고 했다. 버리거나 피하는 대신, 거기서 ‘무엇’을 얻으라고 했다.


그날, 나는 또 다른 상인을 만났었다. 예수의 말 한마디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조심스레 말하던 중년 남자였다.


“그 말씀, 좀 위험하지 않소?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니... 그게 과연 올바른 방식일까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말 끝에 느껴지는 불안은 알 수 있었다. 세상은 언제나 돈을 묻고, 사람은 언제나 돈에 매여 있었으니까. 하지만 예수의 말은, 그 돈을 ‘목적’이 아니라 ‘도구’로 돌려놓으라는 것이었다.


가난한 자에게 내어주어라. 그것이 네가 설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될 수 있다. 부당한 것으로라도, 타인을 위해 사용된다면 그 재물은 도리어 문이 될 수 있다. 닫힌 세계로부터, 열린 집으로 향하는 문. 내가 만났던 노인은 그 구절을 반복해서 읽으며 말했다.


“그건 말이야, 결국 셈의 차이야. 돈을 지키는 게 아니라, 돈으로 무엇을 지킬 수 있을지 계산하는 거지.”


그가 가리킨 장부에는 잘게 나뉜 금액과 이름들이 적혀 있었고, 어디엔가 지워진 흔적들 위로 다른 손글씨가 겹쳐져 있었다.


“이 사람은 아이가 셋이었지. 밀값을 줄였어. 저 사람은 지난해 아내를 잃었고, 기름값을 깎았어.”


나는 다시 예수의 말을 떠올렸다.

‘지극히 작은 일에 충실한 사람은 큰 일에도 충실하다.’


그가 말한 ‘작은 일’은 어쩌면, 그런 장부 위의 자잘한 금액들, 하루치 식량의 값어치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 작은 것 하나를 어떻게 다루는지가, 그 사람의 마음을 보여준다고 말이다. 우리는 늘 크고 거창한 것에만 관심을 두지만, 예수는 반대로 물었다.

너는 작은 것 하나에 충실할 수 있느냐고.

세상의 재물.
그것이 남의 것이라면,
너는 그 남의 것에도 성실할 수 있느냐고.
너는 그 남의 재산을 돌보는 손으로 살아갈 수 있느냐고.


예수는 그렇게, 뼈아픈 질문을 던졌다.

하느님이 너에게 진짜를 맡기시기 전에,
먼저 작은 것에 충실한지를 보신다.
먼저 남의 것을 어떻게 다루는지를 본다.
먼저 세속적인 것 하나를, 어떻게 쥐고 놓는지를 지켜보신다.


그렇기에 어떤 이에게는
그 돈이 곧 시험장이었고,
또 어떤 이에게는 그 돈이 곧 초대장이었다.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어.”


그 말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두 주인을 향해 시선을 나눠 둔다. 한쪽은 재물이고, 한쪽은 하느님이다. 예수가 말한 것은 선택이었다. 둘 다 섬기려는 마음을 경계하라는 것이 아니었다. 결국 그중 하나를 ‘섬기게 될 것’이라는 단언이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실은 돈에 지배당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그 청지기는 그것을 마지막에 깨달았다. 재물을 붙잡는 손을 조금씩 풀면서 그 손으로 사람을 향해 뻗었다.


나는 문득 생각했다. 그가 남긴 ‘불의한 탕감’은, 어쩌면 가장 선한 연결이었다고. 그가 내어준 그 숫자들의 조정은 사람의 존엄을 회복시키는 작은 용기였다고.


불의한 재물이라도, 그것이 사람을 살리고 관계를 이어준다면 그 재물은 하느님께 바쳐진 셈이다.







그 이야기가 끝났을 때, 한 사람이 문득 내게 말했다.


“그 사람들 말이야. 예수의 말을 듣고 웃었다더군. 코웃음을 쳤대. 말도 안 되는 얘기라고.”


나는 물었다.

“어떤 사람들?”

그는 고개를 기울이며 조용히 말했다.

“바리새인들이지. 그들은 돈을 진심으로 좋아했거든.”


나는 그때 처음으로 이 이야기가 단순한 청지기의 삶이 아니라는 걸 실감했다. 그것은 더 깊고 날카로운 물음이었다. 재물을 다루는 문제를 넘어서, 재물로 사람을 평가하는 시선에 대한 도전이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능통했다. 그들은 가르치고, 판단하며, 스스로의 경건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리고 동시에, 눈에 보이는 것들에 집착했다. 그들의 손에 쥐어진 금전, 그들의 옷깃을 스치는 사람들의 존경, 그들의 기도 소리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는 군중들.


그들은 생각했다.

“율법을 잘 지키면 복을 받는다. 재물은 그 복의 증거다. 우리는 복 받은 사람이다.”


그러니 예수가 말한 “불의한 재물이라도 내어주라. 그것으로 친구를 사귀어라. 너는 하느님과 재물, 둘 중 하나를 섬길 수밖에 없다”는 말은, 그들에겐 치욕이었을 것이다.

믿음과 복을 등식처럼 여긴 이들에게, ‘그 복이 하느님께 가증한 것일 수도 있다’는 말은 차라리 모욕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비웃었다. 예수의 말은 어리석어 보였다.

재물을 나누라고?
그건 복을 내어주는 일이라 생각했다.

복을 쥐고 있어야, 하느님이 함께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예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는 그들을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옳은 체한다. 그러나 하느님은 너희의 속을 다 아신다. 사람들에게 떠받들리는 것, 그건 하느님께 가증스러운 것이다.”


그 말의 무게는 간단하지 않았다. ‘가증스럽다’는 단어는 율법에서 가장 날카로운 표현 중 하나였다. 우상을 말할 때 쓰이던 말이었다. 하느님을 두고 다른 존재를 신처럼 여기고, 그 앞에 무릎 꿇는 행위. 하느님을 사랑한다면서, 사실은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긴 상태. 바리새인들의 경우, 그 우상은 ‘돈’이었다.

그들은 돈을 하느님의 복이라 불렀지만, 실은 그 돈이 하느님보다 높았고, 그 돈이 경건의 기준이 되었고, 그 돈이 다른 사람의 신앙마저 재단하는 잣대가 되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방식으로 재물을 쌓는 것. 자신의 경건을, 경제적 여유로 입증하려는 것. 그것은 겉으로는 신앙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전혀 다른 신을 섬기고 있는 셈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돌아오는 길에, 오래된 회당 근처를 지나쳤다.

그 벽에 걸린 장식들, 조용한 예배자의 발소리, 그리고 뒷마당에 세워진 화려한 집들.


문득 떠올랐다.

‘하느님께서 그들의 마음보를 다 아신다.’


그 말은 위협이 아니었다. 오히려, 외면에만 집중하던 이들에게 건네는 초대였다. 겉이 아닌, 속을 돌아보라는 초대. 칭찬보다, 침묵 속의 진실을 택하라는 초대. 예수는 결코 사람들의 삶을 가난으로 몰아가려 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그 삶을 지탱하는 중심이 ‘돈’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어야 한다고 말했을 뿐이다. 나는 다시 청지기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는 불의한 셈법으로 사람의 마음을 얻었다. 바리새인들은 정당한 셈법으로 사람의 존경을 샀다. 그러나 결국 하느님께서 기뻐하신 것은 전자가 내민 불완전한 손이었다. 나는 그것이 무섭고도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하느님은 완전한 계산보다, 조심스레 내민 엉성한 손길 하나를 기억하신다. 그분의 셈법은, 우리가 아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그날 저녁, 나는 다시 회당의 문을 지나며 작은 웅성거림을 들었다.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누군가는 손가락으로 책 두께의 장부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도 율법은 지켜야지. 아무리 새로운 시대라지만, 하느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잖아.”


그 말은 오래된 건물의 돌벽처럼 단단했다. 지켜온 시간만큼이나 단호한 말이었다.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마음속에서 예수의 말을 되새겼다.


“요한 때까지는 율법과 예언자의 시대였다. 그 이후로는 하느님의 나라가 선포되고 있다.”


그 말은 분명히 한 시대의 끝과 또 다른 시대의 시작을 가리키고 있었다.

율법과 예언자들,
오래도록 사람들의 길을 인도해 온 규범과 말씀들.
하지만 이제, 예수를 통해 선포된 것은 ‘하느님의 나라’였다. 그 나라는 아직 눈에 보이지 않았다. 정치적인 체제도, 성문법도 없었다. 그러나 그 나라는 지금도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들어가라’가 아니라 ‘들어오도록 초대받는 나라.’ 억지로 밀고 들어가는 성문이 아니라, 누군가 간절히 붙잡고 문을 열어주는 자리. 나는 예수의 말 중 그 표현을 오랫동안 곱씹었다.

“누구나 그 나라에 들어가도록 강권되고 있다.”


사람들이 스스로 뛰어드는 것도 아니고, 어디서 밀고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그저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문 앞까지 이르러 ‘들어와도 좋다’는 말에 주춤하는 그 순간... 그 초대는, 스스로 준비된 자가 아니라 때로는 준비되지 않은 자에게 주어진다.


그리고 그 초대를 통해 하느님의 나라는 사람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 자리에서 또 다른 말이 이어졌다.

“하늘과 땅이 사라질지라도 율법의 한 획도 없어지지 않는다.”


나는 잠시 멈췄다. 하느님의 나라가 시작되었지만, 그렇다고 율법이 폐기된 것이 아니라는 선언이었다. 어쩌면 그 둘은 완전히 다른 세계가 아니라, 하나의 흐름 안에서 이어진 것이었을 것이다. 율법이 무너지지 않고, 그 정신이 더 깊어지고 더 철저해졌다는 뜻...


예수는 그 말씀의 증거로 가장 일상적이면서도 민감한 예를 들었다.

결혼과 이혼.
그리고 그 사이에서 벌어지는 작은 타협들.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는 자는 간음을 범한 것이다. 버림받은 여자와 결혼하는 자도 간음을 행하는 것이다.”


그 말은 단순한 금지의 명령이 아니었다. 율법의 정신을 어디까지 가져갈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었다.

‘당신은 어디까지 진심이냐’는 물음이었다.


구약 시대에 제사장에게만 적용되던 규율, 이혼당한 여인을 다시 취하지 말라는 그 말씀이 이제는 모든 사람에게 확대되어 선포되었다. 하느님이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다는 명확한 원칙. 그 안에는 단순히 결혼 제도의 엄격함을 넘어서, 관계를 바라보는 깊은 존중이 담겨 있었다.


이제는 사람 사이의 약속조차 하느님의 뜻 안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도전. 눈에 보이는 계약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마음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요청.


나는 문득 그 모든 말들이 왜 ‘가증스럽다’는 말로 이어졌는지를 이해할 것 같았다. 사람들 앞에서 ‘옳은 체’ 하며 자신의 욕망을 포장하는 것. 그것은 단지 허위가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의 배신이었다.


율법은 사라지지 않는다.
하느님의 나라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 둘은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넘어서,
보이지 않는 중심으로 향하는 길.

나는 여전히 문을 넘지 못하고,

그 문 앞에 선 자처럼 기록을 계속하고 있다.

청지기의 셈법, 바리새인의 외면,
그리고 예수의 말속에 흐르는 그 조용한 혁명.


그 혁명은
누구를 벌하는 말이 아니라
누구든 초대하는 말이었다.


하느님 나라로,
그리고 진심으로 살아가는 삶으로.




위의 글은 신약 성경 "누가복음 16:1-18"을 각색해서 쓴 글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성경책을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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