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아버지로부터 놋대야를 받았다. 짐작컨대이젠 고령이라 할 수 있고 특별히 물려 주실 게 없다 보니 고육책으로 결단을 내린 것이다. 조선시대로 치자면 아버지는 재세는 물론 재위 기간도 영조의 그것을 넘기고 있다. 아버지가 대기업의 창업주였더라면 내가 사도세자와 같은 비운을 맞지 않았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현실은 물론 막장 드라마에서도 우린 그걸 보고 있지 않은가?
물론 놋대야가 억조창생(億兆蒼生)의 주인이 된다거나 생살여탈(生殺與奪)의 권한을 부여하는 옥새는 아니다. 하지만 우리 가족사(家族史)에서 그 대야는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물건이다. 아버지의 유년시절은 물론 백부와 숙부 등 대가족이 함께 살던 시절에도 사용했으니 어림잡아도 팔십 년 가까운 역사를 지니고 있는 셈이다. 나도 어릴 적에 유난히 크고 광채를 발하던 이 대야로 세수했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가 이십 세를 갓 넘길 즈음 친구들과 밤늦도록 술 마시며 잠시 절제 없는 생활을 하던 시절에 있었던 일이다. 어느 칠흑 같은 밤 아버지가 조부모의 침소를 지나다가 마루에 있던 놋대야를 그만 걷어차고 말았다. 적막한 밤이라 꽤 큰 소리가 났다. 그때 할아버지의 나직한 말이 들렸다. “근묵자흑(近墨者黑)이니라~”좋지 않은 친구들과 어울리다 보면 같은 부류가 된다는 뜻이었으리라. 꾸중이 이어질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뿐이었다. 어떤 때는 소리 없는 질책이 더 뇌리에 남는데 바로 그런 경우가 아닌가 싶다.
놋대야가 우리 가족의 부침(浮沈)을 말없이 지켜본 데다 할아버지 생전에 다하지 못한 효도에 대한 회한이 서려 있기에 아버지는 놋대야를 고이 간직해 오셨다. 나도 후에 놋대야를 보면 아버지와 어머니 생각이 나 눈가에 이슬이 맺힐(misty-eyed) 것이다. 가세가 기울고 얼마 안 되어 할아버지, 할머니와 사촌이 정착한 곳이 월미도다. 그래서 월미도 공원에 산수국을 보러 갈 때마다 그 막막했을 시간을 생각해 본다.
충청도 서해안에선 은하 호라는 정기 여객선이 인천항을 오간 적이 있었다. 나도 어릴 적에 타 본 적이 있는데 바다의 신비로운 느낌이 지금도 살아 있는 듯하다. 인천에서 충청도 출신이 국회의원에 당선이 자주 되는 이유는 그 여객선으로 인천을 오가다가 정착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인 듯하다.
대야의 시가는 얼마 안 될 것이다. 하지만 가족의 손때가 묻어 있기에 값을 매길 수 없는 가치가 내재해 있다. 이런 가치를 센티멘털 밸류(sentimental value)라 하는 모양이다.
우리나라 수필문학을 대표하는 금아 피천득이 생전에 그토록 아끼던 인형을 본 적이 있다. 찰스 황태자는 성인이 된 이후 외국 여행할 때 어릴 적의 테디 베어(곰 인형)를 가지고 다녔다. 또한, 젊은 베르테르가 권총으로 자살하기 전 남긴 유서에서 그가 로테와 시간을 보낼 때 그녀의 눈길이 머물렀을 자신의 옷도 함께 묻어달라고 당부한다 (여간 잔망스럽지 않은 소녀도 생각난다). 이들 역시 대표적인 센티멘털 밸류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