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직장 생활을 오래 한 비결

어느 만년 부장의 회고

by 김광훈 Kai H

오래전 일이다. <어니언스>의 가수 임창제가 신입생 환영식에서 초청 가수로 무대에 올라 대뜸 하는 말이 <편지>라는 노래를 4000번 넘게 불렀다며 한숨을 내쉬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25년쯤 지났다. 가족과 함께 북한강가를 드라이브하다가 <편지>라는 ‘라이브(뮤직) 카페’에 들러 임창제 씨를 만났다. 20여 년 전에도 4천 번이었다는데, 지금은 얼마나 더 불렀는지 묻고 싶었지만 차마 입 밖에 내진 못하고, 그의 근황만 물어봤던 기억이 난다. 노래가 취미를 넘어 bread and butter(생업)가 되었음에도 수십 년 넘게 그 길을 걸어간다는 건 노래에 대한 깊은 사랑과 열정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촛불이 켜져 있는 카페(Candle-lit Cafe: 카사블랑카의 가사 일부 같기도 하다)에서 20여 년 전 그 가수가 부르는 <편지>를 듣는 밤의 정취는 독자의 상상에 맡긴다.


불과 30~40년 전만 해도 의예과가 최고의 인기학과는 아니었다. 소위 상위권 대의 웬만한 주요 학과면 서울 시내 의대에 진학이 가능했고, 비인기학과라도 비수도권 지역의 의대에 합격이 가능했다. 그때도 의대라면 공부 잘하는 학생이 진학하는 분야이긴 했지만, 지금처럼 소위 <의치한약수> 다음에 서울대가 위치하는 건 상상할 수 없었다. 덕분에 오래전 의사 면허를 취득한 사람들도 진입장벽이 높은 직역이라는 <이미지 상승> 효과는 얻었지만, 꼭 바람직해 보이진 않는다. 내가 보기에 의사 같은 서비스 업종은 공부 잘하는 사람보다는 중상위권 학생 중에서 봉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선발되어야 할 듯하다. 적성 안맞는 일을 성적 때문에 평생하게되는 것만큼 잘못된 선택도 없다. 어쩌다 의사를 만나보면 얼굴에 그게 다 씌여 있다. 의사 출신으로 기업을 운영하다 정치인이 된 동갑나기도 있지만, 의사는 다른 직업으로 바꾸기도 어렵다. 기회비용과 위신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다 아는 비밀이지만 의사 업무의 상당 부분은 AI로 대체할 수 있고 그 추세는 겁 잡을 수 없을 것이다. 남대문 시장에 은행직원들이 카트를 끌고 예금 영업을 하던 것처럼 왕진을 해야 의사의 수입과 사회적 존경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는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사실 중병이 아니라면 집보다 좋은 병원 인프라는 없다. 국가적인 낭비가 너무 크다.


환자(나는 고객이라는 말을 선호한다. 환자 고객이라고 해야 한다. 중환자실 → 집중 치료실 ICU, Intensive Care Unit) 입장에서 최고의 의사는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언행에서 금세 드러난다. 그 일을 좋아하니 일을 더 열심히 하게 되고, 당연히 실력도 일취월장한다. 내가 만일 공부에 취미가 있고 재능도 있어 공부를 잘했다면 <점수가 아까워서라도> 판검사나 의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자세히 밝힐 수는 없지만, 이 직역의 명암을 어느 정도 알기에 이 직업들이 부럽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나는 천상 회사원(회사원이라는 말속에선 은연중 비전문직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웬만한 회사는 사회의 축소판이다. 천상 회사원이라는 말은 유명 출판사를 경영하던 고등학교 여자 동기가 내게 한 말이기도 하다. 거의 모든 직역이 공존한다. 그 안에 변호사, 행정직, 식당, 청소, 약사, 간호사, 제조, 회계사, 판매직, 전산직 등. 그래서 회사원이라는 말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타입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난 조금은 어리숙했고, 때로는 시행착오도 적지 않았다. 어쩌면 멍청하다는 소리를 들을지 몰라도, 나는 회사가 좋았다. 33년 근무하면서 병가 등으로 결근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월요병을 겪은 기억이 없다. 나이가 들수록 현역으로 근무한다는 게 자랑스럽기도 했다.


인터넷 세상에선 회사에 대한 온갖 부정적인 정보가 넘쳐난다. 40대면 그만두어야 하고 대기업도 50대 초반이면 모두 정리된다고 한다. 현실을 반영하고 있기는 하지만, 얼마든지 예외가 있는데 그걸 애써 외면하는 게 문제다. 중견 대기업(법적으로는 300명 이상을 고용하면 대기업이라고 하니 그보다는 규모가 크지만 우리가 통상 대기업이라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작은 기업. 현재 기준으로 총 자산 1조 원 이상)이라도 부장급 정도만 되어도 웬만한 <페이 닥터> 못지않은 연봉이다. 의사도 개업 또는 특수한 지역에 근무하거나 일부 분야는 수억~수십억 원을 버는 경우가 있지만, 고용된 의사의 연봉은 정부 산하기관 공식 통계를 볼 때 알려진 것보다 많지는 않은 듯하다. 개업의라고 만만한 게 아니다. 일반 자영업과 마찬가지로 영업 부진, 의료 사고 등으로 인한 리스크 등 감내해야 할 게 많다.


나는 글로벌 기업의 한국 공장으로 직원이 3,000명쯤(나중엔 아웃소싱을 통해 정직원이 약간 줄었지만, 본사는 3만여 명) 되는 회사에서 부장으로 5년, 선임부장(다른 회사 실장에 해당)으로 15년을 근무했다. 그 흔한(?) 임원 한 번 못 해보고 퇴임했다. 내가 임원이 되지 못한 가장 이유는 능력 부족이지만, 다른 주요한 이유로는 제조업체에서 꽃이라 할 수 있는 이공계 출신 엔지니어가 아닌 문송의 경력 사원이었기 때문이었다(대리나 과장급 경력 사원이 아니고 부장급). 소위 성골이나 진골이 아닌 육두품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회사는 미국계 반도체 회사였기에 엔지니어 우대가 유난했다(공인회계사 출신 사장에게 엔지니어가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는 일화를 한 부장급 토박이 엔지니어가 들려준 적이 있다). 조선시대로 말하면 <청환직>이라는 부심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우리 때만 해도 이공계는 취업이 너무 쉬웠다. 같은 대학교 내에서도 인문대는 취업이 어려웠는데, 공대는 제일 유명한 전자업체에서도 <출퇴근이 가능한지>만 확인한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를 직접 들었다. 당시 전자공학과 출신이 시장에서의 수요는 3만 명인데 전국 대학교 졸업생은 5천 명 정도라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아무튼 내가 여러 가지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매니저를 20년 동안(그동안 물론 3~4차례 구조 조정이 있었다) 유지한 것은 3D 업종이라 여겨진 직역을 재미있게 성공적으로 수행했기 때문이었다. 나중엔 80여 명 정도 되는 조직을 맡기도 했지만, 가장 안전한 때는 작지만 필수적인 조직을 맡고 있을 때였다. 직장 생활을 오래 할 수 있었던 표면적인 이유는 내가 워낙 해외 고객과 오랫동안 일해 그들의 요구사항을 알고 대응을 적절히 한 것도 있었지만, 수십 년 경력을 가진 직원들의 노하우를 인정하고 그들이 능력을 발휘하도록 장을 마련하고 공을 독차지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느 조직에서나 마찬가지이겠지만, 공식적인 직함과 영향력이 반드시 일치하는 건 아니다. 연대장이나 사단장이 주임상사의 존재와 권위를 인정하고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줘야 실적이 나오는 것과 같다. 위세만 부린다고 계급에 굴복해 따르는 게 아니다. 그 원리 정도는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아 그리고 기장 중요한 비결 하나. 무능한 가장이라고 무시하지 않고 진급 못한 변명을 항상 액면 그대로 믿어준 가족이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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