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식장에 운동복 차림으로 가다

결정을 밀고 나가는 용기

by 김광훈 Kai H

얼마 전에 모골이 송연한 경험을 했다. 요양 병원에 다녀오다가 결혼식에 가야 한다는 사실을 불현 듯 깨달았다. 때는 오후 4시. 오래전 받은 카톡을 보니 다행히 그날 오후 5시부터 예식이 시작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복장이 문제였다. 상의가 츄리닝 차림이었던 것이다. 바지는 그런대로 표시가 덜 났으나 운동화까지 신고 있었다.


가까운 친구라 가지 않을 수도 없고 또 사전에 불가피하게 못간다는 말도 안했었다. 집에 다녀오기엔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고 주말이라 길이 막혀 예식장에 제시간에 도착한다는 보장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친구에게 전화해 복장이 정상을 벗어나더라도 용서해달라고 하니, 전혀 문제 없다고 했다.


헬렌 헌트와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려다 복장이 안맞아 양복점에 달려가 기성품을 산 잭 니콜슨처럼 나도 대형 할인마트에 들러 살 수 있었지만, 시간이 촉박한 때문이었는지 그런 아이디어는 생각도 나지 않았다. 예전에 골든 게이트 브리지 일대를 조망하며 식사할 수 있었던 카넬리안 룸이라는 레스토랑도 정장 차림이 아니면 아예 입장이 되지 않았다. 일행 중 한 명이 캐주얼한 차림이라 양복을 대여하는 서비스를 이용했던 기억이 난다. 니콜슨은 청결에 대한 강박증이 있는 소설가 유달 역이라 남이 입던 옷을 안입기에 양복점으로 달려가 새로 샀다.


<뉴욕의 가을>에서 택시를 못잡아 전철타고 온데다 비까지 흠뻑 맞은 여자에게 리차드 기어가 저녁 모임에 가는 걸 제의하자 “가고 싶지만, 꼴이 엉망이라서 (I’d like to go. But I’m a disaster.)”라던 말이 생각났다. 사전에 그녀가 입고 갈 이브닝 드레스까지 세심히 준비해 놓은 작업남. 아무튼 식장에 도착하니 주위의 조명이 어두워서 난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일부 쳐다보는 사람이 있었으나 나를 주목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워낙 여러 건의 결혼식이 동시에 진행되는데다 대형 뷔페 식당을 서로 공유하고 있어 더욱 문제가 없었다. 아무튼 위기일발(It was a close call.)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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