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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겸 Mar 18. 2020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 계속되어야만 하는 것들

진짜로 멈추지 말아야 할 것은 따로 있다


삼류감독 타카유키의 신조는 '빠르고 싸게, 품질은 그럭저럭'이다. 배우의 눈물보단 빠르게 촬영을 끝낼 수 있는 안약을 선택한다. 그에게 영화는 자아실현 수단이 아니라 밥벌이의 도구가 된 지 오래다.

아, 집에 가고 싶다

 그런 그도 어떤 날은 방구석에서 딸의 어린 시절 사진을 보며 눈물짓는다. 사진 속 딸은 캠코더를 손에 쥔 채 타카유키의 목마를 타고 있다. 딸도, 타카유키도 환히 웃고 있다. 그가 그리운 건 어린 시절의 딸뿐만이 아닐 것이다. 영화가 아직은 자아실현의 수단이던 시절의 자신, 딸에게 자랑스럽게 카메라 작동법을 알려주던 그 시절의 자신도 같이 그리운 것이다. 어느 날 그는 귀찮은 프로젝트를 하나 맡는다. 좀비 채널의 개국 기념으로 만들어지는 '생방송', '원테이크', '좀비' 영화. 언뜻 듣기에도 무리한 기획이다. 평상시였으면 단칼에 거절했을 그다. 그러나 딸 마오가 좋아하는 배우가 그 영화의 주인공이라는 사실 때문에 얼떨결에 그 제안을 수락하게 된다.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는 그런 타카유키와 놀러온 부인과 딸, 그리고 현장의 스태프들이 방송사고 없이 생방송, 원테이크를 계속되게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코미디다.

일본 제목은 극 중 영화제목인 'one cut of dead'다.

영화를 본 이들은 영화의 형식적 참신함에 갈채를 보낸다. 영화는 3부로 나눠진다. 1부에선 대뜸 아무런 설명도 없이 저질의 37분짜리 생방송, 원테이크, 좀비 영화를 보여준다. 37분 만에 내려오는 엔딩크레딧에 당황하고 있으면 2부가 시작된다. 2부는 영화를 찍기 전까지 과정을 보여준다. 대망의 3부에선 영화의 촬영 현장에서 생방송, 원테이크를 이어가기 위해 벌어지는 각종 해프닝을 보여준다. 계속되는 돌발상황에 기상천외한 임기응변으로 방송을 이어가는 것이 3부 코미디의 핵심이다. 3부를 보며 관객들은 1부의 영화가 왜 그리 허접한 장면들로 가득 차 있는지 알게 된다. 심지어 그 허접한 장면이라도 찍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까지 알게 된다.  "이 영화 계속 봐야 하나?"라는 의구심을 인내로 바꾸어 1부를 감상하면 3부에선 쉴 새 없이 웃고, 또 웃다, 기어코 찔끔 울게 된다.


딸 마오는 아빠의 영향을 받았는지 영화 현장에서 일한다. 그녀는 작금의 타카유키와는 다르다. 초등학생 배우에게도 "여기는 전쟁터"라며 안약 대신 진짜 눈물을 강요하다 촬영장에서 쫓겨나기 일쑤다. 

좋은 말로 할 때 울어

마오의 영화사랑은 옷차림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한창 꾸미고 싶을 20대지만 그녀는 영화 속에서 주야장천 영화 티셔츠만 입고 나온다. 처음엔 <스카페이스>의 토니 몬타나(알 파치노) 티셔츠를 입고, 다음 등장 땐 <택시 드라이버>의 트래비스(로버트 드 니로) 티셔츠를 입고 나온다. 집에서 쉴 때조차 섬뜩하게도 <샤이닝>의 잭 토런스(잭 니컬슨) 티셔츠를 입고 있다. 이 셋은 할리우드 캐릭터 만신전에 절대 빼놓을 수 없는 희대의 미치광이(?) 캐릭터들이다. 공통점이라면 자신이 성취하고자 하는 것에  모든 정신을 몰두하는 캐릭터라는 것. (토니 몬태나는 아메리칸 드림의 화신이고, 트래비스는 영웅이 되는 것에 심취했으며, 잭 토런스는 산장에 자신을 고립시켜서라도 집필 중인 소설을 완성하고 싶어한다) 옷은 때론 입보다 더 많이 말한다. 하물며 영화 속에서 주인공들의 의상은 그들의 속마음 그 자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녀의 티셔츠들은 영화가 얼마나 마오의 삶을 전방위적으로 포위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그녀는 영화에 미쳐있다. 다만, 그 티셔츠 속 영화 주인공들의 말로가 파멸이었다는 것을 마오가 모를 리 없다. 언뜻 보면 이상하다. 왜 역경을 딛고 성공한 모델들이 아니라 한 가지에 미쳐 결국 파멸을 맞는 주인공들에 마오는 끌릴까? 그녀에게 결말 따위는 그다지 상관없다. 오히려 그들처럼 마지막까지 몰두할 수 있기만을 바란다. 그래서 마오의 열정은 성공한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것이라기보다는 결과야 어찌 됐건 영화에 순정을 바치겠다는 것에 가깝다.

영화 티셔츠를 입은 마오

그녀는 좋아하는 배우를 보러 기어코 타카유키의 영화 현장에 놀러 간다. 그리고 촬영 현장에서 돌발상황이 발생하고, 대본을 달달 외우고 있는 마오는 기지를 발휘해 위기를 봉합한다. 그 후 그녀는 본격적으로 영화에 관여하기 시작한다. 몰입한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감독의 의자에 앉기까지 한다. 이때, 그녀는 더는 롤모델들의 티셔츠를 입고 있지 않다. 어느새 그녀는 지금 찍고 있는 'one cut of dead'의 단체 티셔츠로 갈아입은 상태다. 그렇게 그녀는 영화 티셔츠를 입은 영화 팬에서 성큼 나아가 그토록 원하던 필름 메이커의 자리에 위치한다. 배우를 보러오는 촬영장에 왜 대본을 달달 외워갔을까? 심지어 영화엔 그녀가 남자주인공과 인사하는 장면조차 없다. 그 장면은 애당초 필요 없었을 것이다. 그녀가 관심 있던 건  남자배우가 아니라 영화니까 말이다.

현대인에게 거북목은 몰입의 다른말이다.

그저 완성만 하길 원하던 타카유키도 딸의 영향인지 엔딩을 찍을 지미집이 고장 났을 때는 조금 이상해진다. "어차피 거기까지 안 본다"는 제작자의 말에 타카유키는 이 엔딩은 중요하다며 버럭 화를 낸다. 타카유키가 화내는 씬은 이 씬이 유일하다. 그 모습을 마오는 휘둥그레 쳐다본다. 결국 전 스태프가 모여 인간 지미집을 쌓아 엔딩씬을 찍는다. 이때, 마오는 마치 어렸을 적 사진 속의 모습처럼 타카유키의 목마를 탄 채 카메라를 높이 들고 있다. 마오는 그제야 어린 시절 자신에게 카메라 찍는 법을 알려준 아버지를 기억해낸다. 자신에게 카메라의 존재를 알려주고, 영화의 세계로 인도했던 그 모습 말이다. 이제 마오에게 아빠는 세파에 찌든 삼류감독만은 아니다. 자신만큼 영화에 대한 열정으로 충만했던 한 청년의 모습도 함께 본다. 그렇게 마오는 아빠를 인정한다. 타카유키 또한 마오의 인정을 통해 그동안 밥벌이의 지난함으로 잊고 살던 열정 가득한 자신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이제 타카유키는 더 이상 그저 빠르고 싸게, 품질은 그럭저럭 찍어내는 감독이 아니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영화를 보며 그런 기대를 품게 된다.

정작 방송국의 관계자들은 이 영화에 관심이 없다. 그들은 회사원이고, 이 영화는 그저 많고 많은 회사 프로젝트 중 하나다. 더 절망스러운 건, 대부분의 시청자도 이 허접한 작품을 끝까지 안 보았을 것이란 사실이다. 누구도 관심 없는 영화. 그러나 현장에 있는 스태프들은 필사적이다. 이 영화가 그저 일회용 이벤트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들이다. 그들은 가뜩이나 변변찮은 영화가 돌발상황들로 인해 시시각각으로 망해가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면서도 포기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영화를 완성하기 위해 땀을 흘리며, 뛴다. 감독 우에다 신이치로는 3부의 메이킹 과정을 통해 영화와 삶을 일대일로 병치시킨다. 어떤 삶도 뒤로 돌아갈 순 없다. 생방송, 원테이크다. (다만 좀비가 아닐 뿐이다) 영화는 관객들에게 묻는다. 이번 영화(혹은 생)가 원래 계획보다 조금 부족한 거 같은데 어떻게 하겠냐고. 그렇다고 카메라를 멈출 순 없지 않겠냐고. 시대에 남는 명작이 될 확률은 희박하겠지만, 그 끝에는 치열하게 버텨온 자만이 느낄 수 있는 숭고함이 분명히 있지 않겠느냐고 묻는다. 이렇게 우에다 신이치로는 이 영화를 메타영화(영화에 대한 영화) 속에서 으레 반복되는 제작자에 대한 자기연민에서 벗어나 범인의 삶의 태도로 그 의미를 확장한다. 애당초 2개의 상영관에서 개봉한 이 작은 영화가 200만 명이 넘는 관객 수를 동원하고, 자국이 아닌 대만에서도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게 된 것은 이런 메시지가 관객들에게 소구한 연유일 테다.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는 촬영을 멈추면 안 된다는 말을 통해 삶 속에서도 지체나 서행은 해도 정체하진 말자고 이야기한다. 엘리트적인 삶이 아니라 평범한 삶을 계속해서 살아나가는 동력 그 자체에 주목한다. 잘 되어가는 것을 계속하기도 물론 어렵다. 하지만 삐거덕거리는 느낌을 받으면서도 계속하는 건 아무도 주목해주지 않기에 더 어렵다. 대상에 대한 깊은 믿음 없이는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후자는 어떤 의미에서 더 숭고하다. 이렇게 우에다 신이치로는 마오의 영화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과 메이킹 과정에서의 스태프들의 발버둥을 통해 지난한 삶 속에서도 어떻게든 계속해보려는 모습에 대해 경외를 표한다.

그 과정에서 이 영화가 보여주는 삶의 태도 또한 인상적이다. 촬영장에 따라왔다가 얼떨결에 교통사고로 못 온 배우의 대타가 되는 엄마 하루미가 반복하는 호신술 '퐁'은 코미디로 가려져 있지만 기실 이상한 기술이다. 상대방이 나를 덮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경쾌한 '퐁' 소리를 내며 희극적인 제스처를 취한다. 이 태도는 이 영화 속에서 인물들이 위기를 헤쳐나가는 모습과 비슷하다. 닥친 상황에 좌절하지 않고 희극적인 자세를 유지한다. 절망스러운 눈빛을 한 채 냉소적인 말을 읊기보단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부단하게 허둥대기를 선택한다. 삶에 대한 무조건적인 무한긍정이 아니다. 마치<인생은 아름다워>의 귀도가 유대인 수용소에서 그랬던 것처럼 발붙인 땅 위의 처참한 일상을 희극으로 갈음해 끝내 긍정해본다. 살아가는 것의 비극성을 직시하는 동시에 희극적 제스처를 취하는 영민한 태도다. 이 영민함은 신이치로가 '퐁'이라는 단어와 3부의 코미디로 우리에게 건네는 태도의 제안이고, 또 피할 수 없는 삶의 비극성에 대한 섬세한 위로다. 그렇게 우리는 우스꽝스럽게, 허둥대며 살아간다. 마치 생방송, 원테이크 영화처럼 말이다.

그리고 재밌는 사실. 많은 이들이 최고의 장면으로 뽑는 '카메라에 얼룩진 피를 카메라맨이 휴지로 닦는 장면'은 실제로 촬영 중에 갑작스레 피가 튀어 실제 스태프가 불가피하게 애드리브로 닦은 것이다. 그런데도 영화를 본 모두가 입을 모아 이 장면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또 하나. 이 영화의 스핀오프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할리우드 대작전>에서 팀을 이룬 타카유키와 마오는 이 부박한 생방송, 원 테이크, 좀비 영화로 일부 장르 팬들과 산업관계자들을 만족시켜 꿈의 땅, 할리우드에 진출할 기회를 얻게 된다. 이 무리한 기획이 되레 기회가 된 것이니 참 아이러니하다. 감히 누가, 무엇을, 어떻게, 예단할까. 정말로 일단 카메라를 멈추지 않고 볼 일이다.

다급한 손놀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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