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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관홍 Sep 13. 2021

흔하디 흔한 개발자는 지나갑니다

지나가는 개발자 1


10년전쯤에 수능을 봤다. 언어영역은 기대한만큼 나오지 않았고 예상대로 수리영역은 처참했다. 언제나 믿을 구석이었지만, 3학년 때 부진했던 외국어 영역은 당당히 수능에서 명예 회복을 했다. 그리고 재수는 절대 하기 싫어서 대학에 원서를 접수했다. 가나다 군 중에서 기억나는 건 나군과 다군이다. 물리학과 한 군데와 컴퓨터공학 한 군데를 지원했고 결과는 두 군데 모두 합격이었다. 예상 밖이었던 건 컴퓨터공학과는 우선선발이 되었다는 것이었다(외국어 고마워). A대 물리학과 사무실에서 전화를 받았을 때는, B대 컴퓨터공학과로 가기로 마음을 먹은 상태였다. '프로그래머가 내 길이야!'는 절대 아니었지만, 진로에 대해서 깊은 고민을 해본 적 없었던 평범한 수험생은 물 흐르듯이 컴퓨터공학과 학생이 되었다.


대학 입학 후 6년이 흐른 후에 취업을 했다. 컴퓨터공학과를 졸업해서 컴퓨터공학 대학원에 진학해서 소프트웨어 회사에 병역특례로 들어갔다. 단 한 번의 휴식도 없이, 다가오는 한 학기를 꾸역꾸역 쳐내면서 사회로 나오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지나가는 개발자 1이 되었다. 남들처럼 거창한 스타트업의 꿈이나 슈퍼 개발자, 만들고 싶은 그럴듯한 서비스를 생각한 적이 없다. 열정이란 남의 얘기였고, 그냥 취업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다행이었다.


지나가는 퇴사인 1


지나가는 개발자 1로 시간을 보낸 지 약 4년 반의 시간이 흘렀다. 병역특례 업체에서 3년의 시간과 한달간의 훈련소 생활을 보내면 병역의 의무로부터 자유로워진다. 3년에 1년 반을 더해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흔히 말하는 개발자로 일했다. 2021년 2월 26일 마지막으로 출근하여 퇴사 업무를 모두 마쳤다. 그렇게 나는 자발적 퇴사인이 되었다.


세상 밖에선 극심한 취업난과 더불어 개발자 붐이 한창이었다. 개발자들은 몸값을 불려 깡총깡총 다른 회사로 떠났으며, 코딩 학원들은 저마다 시끄럽게 광고를 했다. 이른바 코딩 광풍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진지하게 개발자를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나를 추스리는 상반기


3월부터 퇴사인이 되었다. 막연하게 5월달까지는 재취업이나 전직과 같은 진로 고민을 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독서와 글쓰기로 나를 발견하고 내면을 다지기로 했다. 남들의 욕망을 욕망했고, 내가 아닌 곳에서 나를 찾았다. 그렇게 스스로 생활을 바로 세우기 위해 루틴 만들기 연습을 시작했다. 하루를 온전히 나의 선택으로 채우는 일은 어색하지만 설레는 일이었다.


당연하지만 생각보다 나와 보내는 시간이 어색했다. 그동안 혼자 보내는 시간은 많았지만, 가만히 나에게 말을 걸어본 적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누군지 몰랐고, 매번 세상 속에서 중심 없이 흔들리는 연약한 사람이었다. 문득 글쓰기로 나에게 말을 걸어보았다. 아직 회사를 다니기 전 나갔던 글쓰기 모임에서 느꼈던 자기 발견의 경험을 되살려보고 싶었다.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느낌을 가지는 사람인지 하나씩 답해보았다. 느리지만 확실한 방법이었다.


혹시나 해서요


6월달에 들어서는 아무생각 없이, 개발자 포지션으로 입사지원을 시작해보았다. 다시 개발자로 일하고 싶다라기 보다는, 그냥 2-3년은 하던걸로 돈이나 벌자라는 단순한 동기였다. 당장 새롭게 도전해보고 싶은 것도 없었기 때문에, 일단 움직여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아무런 준비 없이 그냥 부딪혀 보면서 방향을 정해보기로 했다.


결과적으로 나의 마음을 다시 확인하게 된 시간이었다. 아 이건 정말 아니다 싶었다. 면접을 몇군데 보면서 인생의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다는 생각이 분명해졌다. 새로운 기술을 열정적으로 배울 욕심이 전혀 생기지 않았다. 스타트업 특유의 열정! 열정! 열정!만으로 내 안의 꺼져버린 재에는 불이 붙을 수 없었다. 정말로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한 달 동안 몇번의 면접을 보고 마음을 접었다. 개발자는 아니다. 더 이상 억지로 마음을 부려 이 일을 하기에는 앞으로 일은 더 어려워질 텐데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일단 마음을 접어둔 채로 여름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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