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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관홍 Sep 27. 2021

배우처럼 인생을 살고, 평론가처럼 인생을 바라보자

나와 적당한 거리를 두기

"나는 때때로 나 자신을 분리하는 연습을 한다. 길을 걸을 때면 가끔 드론이 되는 상상을 한다. (...) 나는 드론이 되어 나의 행동을 하늘에서 바라보면서 분석하고 평가한다. 이 과정이 자기 객관화의 과정이다. 그렇게 자기 객관화가 되면 기존의 감정 상태에서 나를 분리하며 마음의 평정을 되찾는다. 마음이 그냥 무덤덤해지는 것이다."

<내 마음과 거리두기> - 설기문


자기 객관화가 가능할까?


예전에 어떤 드라마를 본 기억이 떠올랐다. 티비 화면이 주인공의 정면 얼굴으로 가득찬 장면. 숨이 막히는 듯 답답하고 긴장감이 느껴질 정도의 거리였던 걸로 기억한다. 나에 대한 글을 쓸 때, 나를 바라보는 시각을 익스트림 클로즈업(Extreme Close-up)이라고 표현했고, 그때 그 숨막히던 장면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세상 속에 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내 얼굴 이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스크린. 지금까지 나라는 영화에서 풍경을 비추는 씬은 거의 없었다.


감정에 매몰되어 상황을 과도하게 해석하는 버릇이 심했다. 감정에서 빠져나와 거리를 두어야만 했다. 나는 스스로 감정을 증폭시키고 패배했다.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야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찰 카메라나 브이로그를 보는 것처럼 나의 바깥에서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선을 획득하고 싶었다. 


객관화라는 건 시소를 타는 기분이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무게중심을 어떻게 옮겨야 주관에서 객관으로 자리를 옮길 수 있을지, 나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을지 혼란만 커져갔다.



왜 자기 객관화를 하고 싶은가


주관과 객관을 판단하려고 하면 그 사이에서 길을 잃기 쉽다. '객관적'으로 생각했을 때, 지금 내 기분과 생각과 맞을까? 라고 자문하면 감정과 느낌에 혼란이 생긴다. 질문은 의심이 자라날 기회를 제공한다. 객관이 필요한 건, 필요 이상의 과잉 해석을 방지하기 위해서 아니었나. 스스로에 대한 자기 확신이 필요한 나에게 의심은 나를 좀먹는 병균과 같았다. 의심에서 확신으로 가기 위해서는 '익스트림 클로즈업'이 아닌 다른 시점이 필요했다. 그렇게 혼자만의 시선에 갇혀 '객관성'이라는 착각의 잣대로 의심을 증폭시키고 나를 스스로 지워냈다.


결국은 어느 한 점에 머무는 영구적 평형 상태로 안착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할지도 모른다. 주관에 매몰되어 객관이라는 시선을 고려하지 않는 상태가 위험하기 때문에, 자기 객관화를 연습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자기 객관화를 잘 하는 사람이 부러운 건 스위치를 켜고 끄듯이 주관과 객관을 상황에 따라 활용하는 것을 닮고 싶은 것이 아닐까. 


영화의 주인공처럼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게 즐거우면 즐거운대로 슬프면 슬픈대로 '그 감정만큼만' 역할을 다하고, 그 후에는 평론가가 되어 더 이상 역할에 매몰되지 않는 일. 그건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이지만, 영화가 계속되기 위해서는 필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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