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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관홍 Jan 13. 2022

우리가 처음이라고 부를 때

처음이라고 생각하는 마음

처음이라 설렜던 첫 순간


밤 9시 사무실은 고요하다. 건너편에서 야근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백색소음처럼 들린다. 슬슬 전철 시간이 신경 쓰이기 시작한다. 비어있는 옆자리에 올려놓은 보스턴백을 바라본다. 한 장이라도 더 볼까 싶어 책가방을 봇짐처럼 메고 다니던 성격엔 이게 차라리 마음이 편하다. 사무실이 조금 쌀쌀해질 때쯤 소소한 걱정들을 담은 보스턴백을 메고 김포공항으로 향했다. 새벽 5시 50분 비행기를 예매한 대가로 김포공항 앞 피시방에서 쪽잠을 잤다. 그래도 마냥 불편하거나 번거롭지는 않은 기분이었다. 새벽 틈 황량한 공기와 두꺼운 어둠은 조금 무서웠지만, 제주의 푸른색을 떠올리며 공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가을날 혼자 걷는 새벽길은 꽤나 쌀쌀했다.


처음으로 혼자 떠나서 혼자 돌아오는 여행이었다. 입사한 지 만 1년 된 신입은 적은 돈과작은 돈과 시간이 생겼다. 생활 한 구석에 빈칸이 싹을 틔우던 시절이었다. 사실 여행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휴식이었다. 계기는 팔로우하던 책방에서 북 콘서트를 연다는 소식이었다. 그것도 제주에서. 식당과 숙소가 모여있는 단지 안에서 2박 3일 동안 북 콘서트를 연다는 게 왠지 모르게 낭만적으로 느껴졌다. 가을은 그렇게 종종 마법을 부린다. 입사 1년 차를 지나 가을을 타던 나에게 무언가의 신호처럼 여겨졌다. 일상의 리듬을 중요시하는 나에게 즉흥은 불현듯 찾아온다. 그렇게 정신을 차려보니 제주 공항 게이트를 빠져나와 높게 자란 야자수를 마주하고 있었다. 그제야 거추장스럽던 보스턴 백은 잊은 채 순수하게 설렘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도 엉겁결이라고 느꼈던 선택을 받아들인 건 야자수가 너는 지금 제주에 있다고 환기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안녕 제주, 오랜만’이라고 인스타그램에 야자수와 함께 올린 건 그런 마음을 기억하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른다. 


순간에 꽂는 책갈피


숙소 단지와 근처에서 밥을 먹고, 북 콘서트에서 책에 사인을 받았다. 옥상에서 멀리 보이는 바다와 성산 일출봉을 닮은 잔잔한 하루의 연속이었다. 무엇보다 기억에 남았던 건, 둘째 날 저녁 시간 무렵이었다. 저녁 준비로 기분 좋은 소음이 깔리던 숙소에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해가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모습을 하염없이 눈으로 좇았다. 해는 처음과 끝이 없는 궤도를 영원히 반복해서 돌고 있었다. 아마도 그때 노을을 바라보면서 떠나온 이유를 발견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정해진 처음은 없다. 처음과 끝이라고 이름 붙이기 나름이다. 비행기를 탄 건 처음이 아니었지만, 혼자서 비행기를 탄 건 처음이었다. 제주는 처음이 아니었지만 혼자 제주는 처음이었다. 한편 거꾸로 생각해보면 모든 처음 속에는 작은 익숙함도 숨겨져 있을 수 있다. 처음 하는 일에 벌벌 떨었던 건 끝을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모든 것은 순간이기에 변하지 않는 건 없다는 존재의 가벼움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순간을 받아들이면 삶이 조금 더 가벼워지고 즐거움이 눈에 보이게 시작한다. 그날 제주는 나에게 하나의 순간이었다. 처음이라고 생각해서 설렜던 첫 순간들을 만난 여행. 처음이라는 색안경으로 바라보느라 마냥 두려워만 하지 않았던 시간이었다. 하나의 경험을 통과하면서 기억해야 할 건 그런 순간들이다. 앞으로 마주할 내가 정한 ‘처음’들은 걱정보다는 설렘이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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