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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소녀의 죽음, 사소한 일이 아니다

아다니아 쉬블리, 《사소한 일》

by ENA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의 기습 작전으로 시작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사태는 전 세계적으로 긴장감을 드리우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관심사에서 밀려날 정도다. 한쪽에서는 하마스의 비인도적인 인질 구금을 비난하고, 또 한쪽에서는 이스라엘의 무자비한 팔레스타인 점령 정책을 비난한다. 러시아-우크라니아 전쟁에서 일부 국가를 제외하고는 러시아를 비난, 혹은 비판하는 모양새와는 다른 양상이다. 단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대립만이 아니라 이란의 개입 문제, 미국 등의 가자 지구 공격에 대한 지지 문제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이 문제가 어떻게 해결될 것인지 지켜보고 있다. 과연 해결될 수는 있는 문제인지가 의심스럽기도 하다.


팔레스타인 문제는 정말 복잡한 문제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현재의 상황을 촉발시킨 것이 하마스의 기습 공격 때문이라고 하면, 그게 왜 그들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그건 이스라엘의 잘못이라고 하면, 이스라엘은 또 왜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는지를 얘기한다. 그건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아랍의 잘못. 계속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이어진다. 결국 가다 보면 먼 옛날 유태인이 가나안 땅에서 쫓겨나던 시절로 거슬러 가고, 또 오랜 세월 동안의 유태인 박해의 역사를 언급하게 되고, 그러다 시오니즘을 이야기하게 된다. 유태인의 고통을 이해한다고 하는 순간, 반대편에서는 그렇다고 멀쩡히 다른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던 땅에, 옛날에 우리 선조가 살던 땅이라고 차지하고 들어와 국가를 선언하는 게 마땅한 일이었는지, 그 후에 그들이 팔레스타인 민족에 대한 처사 등을 생각하면 또 고개가 기울어진다. 과거 팔렛스타인 해방기구, 즉 PLO 의장이던 아라파트를 두고 테러리스트 수장이라고 하는 이가 있었는가 하면, 독립의 영웅이라고 하던 이도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나의 입장을 생각하자면, 우리 임시정부의 김구와 같은 인물이라고 여기기도 했었다. 아무튼 복잡한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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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상황에서 팔레스타인 출신 작가 아다니아 쉬블리의 소설 《사소한 일》이 나왔다. 두 개의 이야기가 있다. 하나는 1949년 8월의 일이다. 이스라엘 점령군 소대장 이야기다. 단 며칠 동안 그를 추적한다. 그는 정찰 도중 무장하지 않은 아랍인 무리를 사살하고, 살아남은 소녀를 데리고 와서 강간한다. 그리고 죽인다. 삼인칭 시점으로 기술하고 있고, 어떤 감정적인 언어는 동원하지 않는다. 1949년 8월 13일의 일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야기는 그런 일이 벌어진 지 사반세기(25년을 여기서는 굳이 그렇게 표현하고 있다) 후 그날에 태어난 한 팔레스타인 여성의 이야기다(참고로 말하자면, 나도 그 소녀가 죽은 그 날짜에 태어났다. 묘한 느낌이다). 앞의 이야기를 다룬 기사를 읽고, 그 현장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여기서는 일인칭 시점이고, 주인공의 감정이 혼란스럽다.


소설은 이 두 이야기와 함께 주변의 이야기를 통해 팔레스타인을 보여준다. 팔레스타인의 과거와 현실을 분개하며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도 주목하지 않을 일(아마 거기선 한두 사람이 사살되는 일이 얼마나 큰 비중을 두고 다뤄질까 궁금하다)을 통해서, 그리고 일상적인 일(다른 나라에서는 전혀 일상적이지 않은 일)을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면서 그곳에서의 삶이 얼마나 비정상적인지를 알리고 있다. 그와 함께 복잡한 정세를 굳이 이해시키기보다는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 근본적인 방법은 보편적인 데서 찾아야 한다고 얘기한다.


“탱크가 아니라 인간이 승리하리라”라는 문구를 여러 차례 반복한다. 그런데 이 문구가 어디에 쓰이느냐에 따라 그 의미는 매우 달라진다. 이 문구를 팔레스타인인이 썼다면 이스라엘의 무력에 대한 비난이 되지만, 이스라엘군이 썼다면 그들의 정신 자세를 강조하는 문구가 될 것이다. 이렇게 하나의 문장을 보고도 서로 달리 해석하는 상황에서 과연 보편적 인간성에 바탕을 둔 해결이라는 게 과연 가능한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작가는 불가능한 해결책에 집착할 수 있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피를 토하며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독자들이 꿈을 꾸고, 그래야 조금이라도 그 이야기가 어딘가에 닿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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