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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와 생물학자, 죽음과 노화를 이야기하다

후안 호세 미야스후안 루이스 아르수아가, 《사피엔스의 죽음》

by ENA

소설가와 고생물학자는 《루시의 발자국》에서 진화, 주로 인간의 진화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면, 이번에는 생물학과 진화학에서뿐만 아니라 철학, 사회학, 문학 등등 모든 분야에서 매우 민감한 문제일 수밖에 없는 죽음(과 노화)에 대해 대화를 나눈다.


죽음은 성(性), 이타성과 함께 신다원주의의 난제로 꼽힌다. 왜 포유류는 성을 갖는지, 왜 죽음이라는 게 존재하는지, 이타성은 어떤 이유로 진화했는지에 관한 질문은 20세기 중반 이후로 여러 가지로 설명하지만 아직도 속시원하게 해결되지 않는 문제이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이에 대해 100% 설명할 수 없다고 포기하고 신(神) 등에 그 설명을 맡기지 않는다. 현재까지의 증거와 논리를 가지고 최대한 설명하고, 그래도 모자란 것이 있으면 다음의 과제로 넘기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우리의 고생물학자 후안 루이스 아르수아가의 태도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는 그 가운데서도 주로 죽음과 노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주제는 특히 70대 중반을 넘어서는 소설가 후안 호세 미야스에게 민감한 문제일 수밖에 없다. 고생물학자는 생물학적으로, 진화학적으로 소설가가 이제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나이가 들어서 여러 가지 질병이 생기는 이유를 죽지 않아서라는 설명은, 사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쉽게 말하지 못하는 것인데 고생물학자는 소설가에게 여러 차례 반복해서 주입한다. 인간은 평균 수명이 50을 넘기는, 매우 특이한 종(種)이다. 그런 특이함은 최근 의학 등의 발달로 더욱 증가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죽음이라는 것이 당연한 것,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매우 불행한 ‘사태'쯤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래서 두렵기도 하다.


고생물학자 아르수아가가 가지고 있는 죽음에 대한 진화학적 설명은 생물학계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기도 하다. 번식 시기가 지난 이후에 발현하는 형질에 대한 자연선택의 무관심, 지속적으로 축적되는 돌연변이, 텔로미어와 같은 구조적 문제 등이다.


이와 같은 것은 사실 따지고 보면, 몇 개의 챕터만으로 설명할 수 있고, 또 여기서보다 훨씬 자세하게 쓸 수 있다. 그런데 왜 이런 형식의 책이 필요할까? 그건 아마도 눈높이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소설가 미야스는 자꾸만 목적론적 관점을 버리지 못하고 반복하고, 고생물학자 아루수아가는 그것을 비판하고 자연선택에는 목적이 없으므로, 개체 수준에서 자연선택이 작동한다는 것을 계속 해서 강조한다. 소설가 미야스의 관점은 많은 일반인들의 관점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일반인의 보편적인 (잘못된) 관점을 이야기하고, 그것에 대한 비판, 내지는 지적을 일반인의 수준에서 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수준 낮은 얘기가 아니라, 매우 수준이 높다. 전문가를 설득하는 것보다 보편적인 일반인을 설득하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며, 더 가치 있는 일이기도 하다. 바로 이 책은 전문성 있는 과학 설명보다도 더 수준 높은 과학 담론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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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아쉬움은 좀 있다. 소설가의 입장과 생물학자의 입장이 좀 더 선명했으면 어땠을까? 그리고 그 양쪽에서 서로 다가가는 과정을 보여주었다면 어땠을까? 생물학자의 입장은 충분히 보여주고 있지만, 소설가는 계속 궁시렁 거린다. 소설가도 죽음과 노화에 대한 자신의 인식을 보여주고는 있지만, 그것은 개인적인 경험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자신의 분야에서 가지고 있는 전문성과 식견을 가지고 죽음과 노화에 대해 조금 더 깊이 있는 인식을 보여주었다면 더욱 알찬 대화가 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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