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 매킨타이어, 《스파이와 배신자》
지금도 국가 간에는 이른바 스파이라 불리는 이들이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상대국의 가치 있는 정보를 얻어내기 위해서 활약하고 있다(그렇다고 알고 있다). 스파이란 말 이 갖는 이미지는 여러 가지가 중첩되어 있다. 약간의 낭만성도 가지고 있으면서, 떳떳하지 못한 신분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도 있다. 여기에 이중 스파이인 경우엔, 배신자 라는 딱지가 붙어 더욱 부정적 이미지가 더욱 강해진다.
벤 매킨타이어의 《스파이와 배신자》는 냉전 시대 KGB 요원으로서 상당히 고위직에 올랐던 올레크 고르디옙스키에 관한 이야기다. 그는 KGB 요원이었지만, 영국의 정보기관 MI6에 소련 및 KGB의 정보를 제공하면서 이중 스파이 역할을 한 인물이다. 약간은 이마가 벗겨지고, 제복은 단정히 입은 채로 무표정한 얼굴로 정면을 쳐다보고 있는 표지 사진의 주인공이다. 우리가 007 시리즈를 비롯하여 르 칼레의 소설 등에서 불 수 있듯이, 스파이 얘기는 원래부터 흥미진진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런 픽션 말고도 실제 벌어졌던 일들은 더욱 손에 땀을 쥐게 할 정도로 흥미진진할 수 있다는 걸 올레크 고르디옙스키의 이야기가 보여준다. 이 스파이가 실제의 인물이고, 냉전의 역사와 관련하여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만약'이라는 가정을 떠올리게 하면서 더욱 홍미를 자아내는 것이다. 우리가 영화나 소설에서는 스파이가 매력적이며, 위험을 절묘하게 빠져나가는 등 상당히 낭만적이게 묘사한다. 그러나 현실의 스파이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신분을 위장한 스파이가 적발되어 원래의 국가로 송환되는 것은 물론, 2중 스파이 행위를 한 이들이 고문을 받고 처형당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이 책 에서는 그런 위험성에 대해서는 깊게 쓰고 있지 않지만 올레크가 적발의 공포에 떠는 모습은 그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댜 그런 위험성이 영화나 소설, 그리고 이런 논픽션까지도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런데 영화나 소설이 주인공이 어떻게든 그 위험을 빠져나갈 것이라는 예측을 하며 보고 읽는데 반해, 실제 현실에 서는 그럴 확률이 매우 떨어지기 때문에 결과를 예측할 수 없으며(물론 그 결과는 나와 있지만), 또한 계획한 대로 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더욱 손에 땀을 쥐며 읽게 된다.
사실 흥미라고는 했지만, 흥미라고만 할 수 없는 것이 냉전이라는 상황이 자본주의 세력과 공산주의 세력이 단지 '냉(cold)'라는 말이 의미하듯 서로 얼어붙어서 으르렁대고만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80년대 초반 소련의 제1권력자 안드로포프의 라이언 작전에서 보듯이, 또 우리나라 대한항공 여객기 격추사건에서 보듯이 열전(hotwar), 심지어 핵전쟁 직전까지 갔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는 올레크 고르디옙스키가 소련과 KGB에 대한 고급 정보를 영국과 미국에 제공했기 때문에 겨우 그런 전쟁을 막을 수 있었다고 쓰고 있고, 또한 소련의 몰락에 이은 냉전의 종식에도 상당히 기여했다고 보고 있다. 물론 올레크 한 사람이 엄청난 역할을 했다는 데는 다른 시각이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그의 역할을 그토록 강조하는 것은 그에 대한 책이므로 당연한 것이긴 하다.
올레크 고르디옙스키는 소련과 소련공상당에 충성을 바친 KGB 요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형 역시 유능하면서 냉철한 KGB 요원이었는데, 올레크가 KGB에 들어가게 된 것은 아버지와 형의 영향이 없었다고는 볼 수 없었을 것 같다. 그런데 그가 아버지나 형과 달랐던 점은 감성적인 면과 함께, 서구의 문학과 음악을 사랑했다는 점이다. KGB 요원으로서 서유럽에 근무하기를 강력히 희망했으며, 그런 이유로 결혼을 서두르기까지 했다. 덴마크에 근무하면서는 서구의 문화에 흠뻑 빠져들었고, 소련이 체코 프라하의 봄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것을 보면서(여기에는 그의 형이 적극적인 역할을 한다) 소련의 권력자들과 나아가 체제에 대해 회의를 가지게 된다. 그렇게 해서 조심스럽지만 적극적으로 영국의 MI6와 접촉하면서 이중 스파이로서 10년 이상 활약하게 된다. 그는 KGB 요원으로서 소련의 권력층과 KGB에 대한(특히 KGB에 정보를 넘겨주는 서구의 이중스파이) 세심하고도 귀중한 정보를 넘겨줌으로써 아주 귀중한 존재가 된다. 그리고 그의 정체가 발각될 위험에 처하면서 영국에서 모스크바로 소환되게 되고, 결국 핀란드를 거쳐 소련을 탈출하게 된다. 이 탈출 장면이야말로 스파이를 소재로 한 논픽션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이라고 할 있다. 세심한 작전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지만, 계획대로 되지 않으면서 그때그때 기지를 발휘하고 우연한 행운으로 겨우겨우 탈출에 성공하고 있다는 점이 더욱 극적인 요소를 더하고 있다.
올레크 고르디옙스키에 대한 저자의 시각은 매우 긍정적이다. 반대편에서 거의 비슷한 역할을 한 CIA의 올드리치 에임스가 돈을 위해서 소련에 미국 등의 정보를 넘긴 것과는 달리 올레크는 소련 사회에 대한 불신과 혐오, 즉 자신의 신념 때문에 그런 일을 했다고 하는 것이다. 이건 서방 기자의 시각임에 분명하다(그렇다면 이념적 이유로 영국을 비롯한 서방의 정보를 소련으로 넘긴 필비 같은 인물도 긍정적으로 봐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그 이유야 어찌 되었든 자신의 조직을 배반하고 몰래 조직의 정보를 상대방에게 넘긴 데 대해서 소련, 현재의 러시아 측에서는 결코 그 행위를 좋게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사실은 그런 좁혀지지 않는 시각의 차이가 이 책을 더욱 흥미롭게 만드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