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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The Road), 묵시록 끝의 희망

코맥 매카시, 《로드》

by ENA

“남자는 거의 매일 밤 어둠 속에 누워 죽은 자들을 부러워했다.”


남자와 소년. 아빠와 아들이다. 대재앙 이후 생존자. 이름은 없다. 필요 없다.


스토리는 매우 단조롭다. 대재앙의 몰아닥친 지구에서 살아남은 남자와 소년이 길을 걸어가는 이야기다. 남쪽으로. 왜 남쪽으로 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곳에 가면 무언가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뿐이다. 먹을 것도 없고, 몸을 제대로 감쌀 옷가지도 없으며, 신발도 없다. 카트에 이렇게 저렇게 긁어모은 것을 담고 하염없이 길을 걷는다.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들이 잿빛, 폐허, 죽음 같은 것들이다. 바로 아포칼립스!


배를 곯다 곧 죽을 것 같다가 먹을 것을 발견하면서 살아남는 일이 반복된다. 수많은 시체를 마주하고, 또 가끔 살아남은 사람들을 만난다. 사람은 위험하다. 그들은 모두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남의 것을 빼앗아야만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마저 먹는다.


어떤 재앙인지, 재앙이 어떻게 지구를 파멸시켰는지,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설명은 없다. 단지 재앙 이후의 세계를 보여줄 뿐이다. 그 아득함이 더 절망스럽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절망이 더 섬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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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전 지구적, 절대적 몰락에 대한 대응에 대해 생각해 봤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기존에 있던 것들을 약탈하고, 남의 것을 뺏으며 살아간다. 그런 삶의 방식이 언제까지 지속될 수 없으리란 건 분명하다. 말하자면 죽기 전까지 살아남는 것이다. 그들에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이제 우린 뭘 하죠?”


하지만 지구상의 소수 종(種)이었던 인간이 살아남은 까닭은 그게 아니었다. 어떤 범위 내에서만큼은 지식을 온전시키며 전파시키고 협력했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소설의 99%의 이야기는 약탈의 이야기며, 살아남기 위해 벌이는, 기약 없는 사투에 관한 이야기다. 그러다 마지막 남자가 죽고, 소년이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이야기로 맺는다. 그렇게 인류는 살아남을 것이다.


은둔의 작가 코맥 매카시의 작품으로는 처음 읽었다. 그가 걸작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영화의 원작자라는 걸 읽기 전 작가 소개에서 처음 알았다.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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