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타이지의, 홍타이지에 의한, 홍타이지를 위한 전쟁

구범진,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

by ENA

병자호란은 치욕스런 전쟁이었다. 임진왜란에서 교훈도 얻지 못하고, 아니 불과 10년 전의 정묘호란을 겪었음에도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고, 입으로만 척화를 내세우다 맞이한 전쟁. 압록강을 건너 조선 땅에 들어온 청의 군대를 저지하지 못하고 임금은 남한산성으로 도망가고, 임금을 구하러 온 군대들은 하나같이 지리멸렬하고, 그래서 결국 47일만에 성에서 나와 청의 임금 앞에서 삼궤구고두라는 치욕을 맞보며 항복한 전쟁. 흔히 이렇게 정리한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정리가 꼭 맞는 것일까? 이 전쟁을 조선의 입장이 아니라 청나라의 입장에서 보면 어떨까? 구범진 교수의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은 바로 그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병자호란은 조선의 대비했으나 홍타이지(청태종)의 준비가 그 위에 있었고, 그들의 전략이 잘 들어맞았던 전쟁이며, 전적으로 이 전쟁은 홍타이지의 기획하에 시작되었고, 홍타이지의 전략 하에 전개되었고, 홍타이지에 의해 끝이 난 전쟁이었다.

XL.jpeg


우선 정묘호란 이후 홍타이지는 왜 조선을 다시 조선에 대해 전쟁을 일으켰을까? 그리고 왜 직접 군대를 이끌고 조선을 치러 왔을까?(나는 이게 제일 궁금했다). 이에 대한 구범진 교수는 황제 즉위식에서 조선의 사신들이 삼궤구고두를 공개적으로 거부함으로써 ’칭제(稱帝)‘의 허구성이 폭로됨으로써 직접 군대를 이끌고 조선을 칠 수밖에 없었다는 설명한다.

조선은 아무런 대비가 없었나? 그렇지 않았다. 나름 철저한 대비를 했다고 보고 있다. 조선군은 정묘호란을 교훈 삼아 산성 거점 방어전략을 편다(산성 입보). 전략적인 위에 있는 산성으로 군대와 백성들을 모으고 장기전을 대비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벌어들인 시간에 임금과 조정은 강화도로 파천하여 대응한다는 전략을 세웠었다. 그러나 이 전략은 이를 역으로 이용한 청군, 즉 홍타이지에 의해 완전히 실패하고 만다. 즉, 청군은 속도전을 펼치며 바로 한양으로 진격했던 것이다. 게다가 시차 진군과 양로 병진 전략으로 (어쩌면 우연히도) 산성에 은거한 조선군이 옴싹달짝 못하는 처지에 놓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인조는 강화도로 들어가지 못했고, 남한산성에 고립되었으며, 평안도와 황해도의 조선군도 발이 묶이고, 전투에서 힘을 쓰지 못하고 패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난공불락이라고 여겼던 강화도는 왜 그렇게 쉽게 함락되었던 것일까? 인조는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항복을 결심할 정도로 이에 충격을 받을 정도였다. 겨울철이라 한강이 얼었고, 그래서 더더욱 군사를 실은 큰 배를 띄울 수 없다고 여겼지만, 청군은 염하수로의 갑곶 나루를 공격 지점으로 택하고, 작은 배를 이용하여 조류가 변하는 시점을 택하는 공격 전략을 씀으로써 거의 무인지경으로 강화도에 상륙할 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조선 해군은 우세한 병력을 써보지도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구범진 교수는 여기에 한 가지 ’낯선‘ 문제 제기를 한다. 청군은 강화도 근처의 지형과 물살에 대한 지식을 어떻게 가지고 있었을까? 청군의 정보원이 있지 않았을까? 이에 대해서 구범진 교수는 <부록>에서 향화호인(向化胡人), 즉 조선에 들어와 살고 있던 여진족의 이반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였고, 특정 인물을 지목하기까지 하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참패한 전쟁에서 인조는 어떻게 조선이라는 나라를 유지하고(’종묘사직을 보전하고‘), 자신의 왕위도 유지할 수 있었을까? 물론 항복은 치욕스런 것이었지만, 다른 경우를 보면 홍타이지는 굉장히 관대한 처분을 내린 셈이었다. 그저 항복하고, 군신의 관계만 맺으면 나라도 유지시켜주고, 왕 자리도 보장해주었던 것이다. 기록을 보면 청의 홍타이지는 정월 16일을 시점으로 조선과의 종전 협상을 서두른다. 고작 왕의 출성과 척화를 강력하게 주장한 신하 두세 명의 압송이라는 조건만을 내걸었다. 왜 그랬을까? 한사코 조선의 협상에 응하지 않던 청이 바로 그 시점에 오히려 협상을 끝내자고 요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 청의 협상 요구는 청군이 근왕병에게 패했다고 남한산성에서 오해할 만큼 갑작스럽고 의아한 것이었다. 애초에 남한산성 공략에 장기적인 고사 작전을 구상하고 있었던 것으로보이는 홍타이지는 갑자기 전쟁을 서둘러 끝내려고 하고 있었다.


그 이유로 구범진 교수는 당시 가장 강력한 전염병, 마마, 즉 천연두(smallpox)가 원인이었다고 주장한다. 당시 조선에는 천연두가 유행하고 있었다. 청은 당시 낯선 질병이었던 천연두에 정말로 민감하게 반응했다. 누르하치와 홍타이지 일가에도 천연두로 명을 달리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 홍타이지는 천연두에 대해 심한 공포를 지니고 있었다. 일상생활은 물론이고 정치, 의례, 외교 등에도 심각한 제약을 받고 있을 정도였다. <청태종실록>에서는 조선의 천연두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 않지만(아마도 은폐?), 여러 파편적인 기록들은 조선에 천연두가 유행했으며, 청과 홍타이지가 이를 매우 두려워하고 조선인을 피하려 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나고 몇 달 후 지나가는 말로 전쟁이 끝난 후 자신이 조기에 귀국한 이유를 “마마를 피해”라고 언급한 바도 있다.


정월 16일 즈음 청군, 그것도 홍타이지의 군영에서 천연두가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에 화들짝 놀란(아니 대단히 겁을 먹은) 홍타이지가 전쟁을 빨리 끝내려고 했으며, 전쟁이 끝나고서 겨우 몇천 명의 군사만 이끌고 바로 자기 나라로 돌아가 버렸다. 물론 인조에게 삼궤구고두라는 황제 즉위식에서 조선의 신하가 거부한 그 의식을 그대로 치르게 하면서 자신의 자존심과 조선 침공의 명분을 달성한 후였다.


병자호란을 주로 우리의 시각에서만, 그것도 비분강개, 혹은 비웃음의 태도로만 봐왔었던 게 사실이다. 중국사 전공의 구범진 교수는 시각을 반대편으로 돌려봤다. 그랬더니 전쟁의 성격이 달라지고, 전개 양상이 달리 보이고, 또 전쟁의 결말도 해석이 된다. 물론 여전히 우리의 시각에서 보고 판단한 여러 상황들을 무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보다 냉정하게 역사를 보고, 이에서 무언가를 얻으려 한다면 반대편의 시각도 필요하다. 그렇다고 이 책의 시각이 지금까지의 우리가 병자호란을 생각해 왔던 것과 완전히 반대된다는 것은 아니다. 덧붙여지고, 풍부해졌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피 속에 죽음과 사랑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