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스 다트넬, 『사피엔스가 알아야 할 최소한의 과학 지식』
대재앙이 닥친 이후의 모습을 다룬 영화와 책은 정말 많다. 핵무기에 의한 것이든, 외계 행성의 충돌에 의한 것이든, 아니면 치료법 없는 감염병에 의한 것이든... 대재앙 이후의 지구 모습은, 어쩌면 매우 비슷하다. 물론 그 세계에서 살아가는 인류의 모습도 대동소이하다. 어떤 스토리가 되기 위해서는 마치 그러해야 하는 것처럼, 살아남기 위해서 악착같고, 갈등하고...
그런데 루이스 다트넬의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난 것은 그런 것들과는 좀 다른 것이었다. 우선은 앨런 와이즈먼의 『인간 없는 세상』이 생각났다. 인류가 완전히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졌을 때 벌어지는 상황에 대한 책이었다. 물론 이 책과는 조금 다른 관점이다. 그러나 인간이 존재하는 조건과 그렇지 않은 조건을 비교하기에는 충분히 의미있는 책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몇 년 전에 방영했던 TV 프로그램 ‘알쓸신잡’이다. 어느 편에선가 무인도에 가져갈 책을 골라오라는 미션에 소설가 김영하는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정재승 교수는 『도구와 기계의 원리』를 골라왔다. 특히 정재승 교수의 선택이 생각났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그 책에 담겨 있다고 했다.
루이스 다트넬은 대재앙이 닥친 이후 지구에서 인류가 살아갈 수 있는 방법, 그리고 어쩌면 다시 문명을 일굴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어떤 이유에서 대재앙이 닥쳤든 우리가 일구어놓은 문명의 흔적은 남아 있을 것이고, 당분간은 그것을 소비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이 시기를 루이스 다트넬은 ‘유예기간’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렇지만 소비만 하는 상황으로는 도저히 버티지 못할 것이고, 남아 있는 것을 이용해서 살아갈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필요한 것은 가지고 있는 것을 가지고 만들어내야 한다. 이 책은 바로 그 방법, 즉 생존에 관한 ‘지식’에 관한 책이다.
유예기간 동안, 살아남은 인류는 인류를 영속시킬 수 있는, 그리고 다시 문명을 세울 방법을 고안해야 한다. 아니, 새로운 문명을 세우기 위해 기초를 다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루이스 다트넬은 그것을 여러 가지로 나누고 있다. 농업, 식량과 옷, 화학물질, 건축자재, 의학, 동력과 전력, 운송 수단, 커뮤니케이션 수단, 시간과 공간을 알아내는 방법 등. 생각 외로 많고, 다양하다. 그러나 아마 더 있을 것이다. 이 목록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 무엇일까? 나는 우리의 현대 문명이 정말 다양한 분야에서 일구어진, 그것들이 아주 복잡하고 정교하게 연결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한 분야의 결핍이 다른 모든 분야의 결핍과 문제로 이어진다. 어떤 한 분야의 발전이 다른 분야의 발전을 추동할 수 있다. 여기서 필요한 것을 다른 데서 가져오고, 그렇게 만들어진 것을 다른 것을 만드는 데 활용된다. 그런 관계가 이 책에서는 무수히 등장한다.
그러면서 또 하나 드는 생각은 ‘나’라는 존재의 미약함이다. 그건 현대 문명의 지극히 세분화된 분업화와 관련이 있다. 나는 여기에서 루이스 다트넬이 언급한 것에 관한 지식을 하나도, 정말 하나도 갖고 있지 않다. 내 전공이라고 할 만한 것에서도 정작 만들어내라고 하면, 대재앙 상황이 아니더라도 성공해내지 못할 것 같다. 다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여기의 설명만을 가지고도 실제로 해낼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있을지 자신하지도 못한다. 우리는 현대 문명 속에서 위대해졌지만, 그것은 우리 인류의 집단적 위대함이었지, 우리 개개인의 위대함은 아니었던 것이다. 우리는 정말 미약한 존재, 더욱 미약한 존재가 되어 있다.
이 책은 물론 대재앙 이후의 인류의 생존 방법에 대한 책이다. 우리가 먼 과거부터 지금의 문명을 일구어온 과정을 되짚어보면서 어떤 것은 그대로 답습하고, 어떤 것은 건너뛰면서, 혹은 다른 방법을 강구하면서 새로운 문명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에 대한 모색의 책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우리 인류가 쌓아 올린 지식에 관한 책이기도 하다. 만약에 대재앙이 닥친다면 우리가 앞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가 지금까지 쌓아온 지식을 얼마나 온존시킬 수 있는지 여부가 관건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우리의 지식이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대부분 과학과 관련된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결국은 과학과 테크놀로지의 역사와 방법에 관한 책이 된다. 과학 때문에 세상이 멸망할 수도 있지만, 결국은 또다시 과학에 의존해야만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