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에 새겨진 사건의 자국을 찾는다

마크 스펜서, 《시체를 보는 식물학자》

by E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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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자연사박물관에서 큐레이터로 일하던 식물학자 마크 스펜서는 어느 날 한 수사관에게서 전화 한 통을 받는다. 강가에서 심하게 부패된 시신이 발견되었는데 시신에 부분적으로 덮여 있는 식물이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 알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시신이 얼마나 그 자리에 있었는지를 판단하는 데 도움이 될 터였다. 마크 스펜서는 그 전화를 계기로 범죄와 관련된 식물학에 관심을 갖게 되고, 결국엔 박물관을 나와 ‘포트폴리오 노동자’, 말하자면 프리랜서 법의식물학자가 된다.


그는 경찰의 요청에 따라 범죄 현장에 나가 식물을 관찰하고 분석하여 상황을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 시신이 얼마나 오래 그 자리에 있었는지, 상황의 선후가 어찌 되는지, 실종된 사람, 혹은 시신이 어디쯤에 있을른지, 용의자의 옷에서 나온 꽃가루가 시신이 있던 곳의 것과 일치하는지 등등 이른바 ‘말없는 목격자’를 통해 사건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다.


우리는 그가 하는 작업을 TV에서 쉽게 봐왔다. 미국드라마 “CSI”를 통해서였다. 그런데 그 드라마는 과학수사에 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지만, 사실은 많은 오해를 낳기도 했다. 한 과학수사대원이 법의곤충학에도 정통하고, 탄환의 흔적을 분석하고, 또 식물학에도 전문적인 지식을 갖는다. 또한 직접 총을 들고 범인을 추적하고 검거하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게 다양한 분야에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면서 그 내용들을 종합해서 판단하는 과학수사관은 없고, 또한 그들이 직접 범인 검거에 나서는 경우는 우리나라나 영국은 물론, 미국에도 없다 한다. 그러니까 마크 스펜서와 같은 법의식물학자는 식물 잎이나 줄기, 꽃가루 등을 통해서 자신의 의견을 내고, 곤충학을 전공한 이는 곤충을 통해서, 뼈 전문가는 뼈 분석을 통해서 등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동원되어 그 의견을 종합하면서 사건의 얼개를 파악해나가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작업에서 법의식물학이 차지하는 분야는 작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때에 따라서 이쪽의 분석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한다(역사적으로 가장 유명한 예는 전설적인 비행기 조종사 린드버그의 아들 납치사건이다). 결정적인 역할이 아니더라도 수색 범위를 좁혀주거나, 수사의 방향이 잘못되어 간다는 것을 알려주기도 하는 등 상당히 많은 경우에 의미있는 역할을 한다. 그만큼 보람있는 작업이기도 하단 얘기다.


그런데 가만히 읽다보니 매우 답답한 상황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법의식물학과 함께 다양한 과학수사기법이 망라되면서 좀 더 과학적으로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추세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상황은 오히려 그 반대라는 것이다. 과학수사에 예산은 점점 축소되어가고, 그래서 과학수사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 줄어들고, 수사관들이 과학수사에 대한 소양을 쌓을 기회도 줄어들고 있다. 책에서는 영국의 상황을 이야기하지만, 우리의 상황도 그리 다르지 않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또 한 가지 의아한 것은 사건이 어떻게 해결되어 가는지 마크 스펜서가 알지 못하는 경우가 흔하다는 사실이다. 그가 열심히 관찰하고 분석하여 보고서를 작성하고 제출하고 나면 끝이다. 재판에서 그의 의견을 다시 듣고자 하지 않는 이상 그는 수사 상황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알 수 없다고 한다. 경찰에서 친절하게 알려주지도 않을뿐더러 물어볼 수도 없는 시스템이라는 얘기다. 자신이 관여한 사건에 대한 어쩔 수 없는 배제로 직업의 보람이 많이 깍이는 상황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오히려 이런 작업에서 자신의 직업적 사명을 느끼는 저자가 대단해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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