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150년 전 일본은 도쿠가와 막부가 무너지고 메이지 유신이 단행되었다. 존왕양이의 기치 아래 천황에게 권력을 되돌려줬고, 일본은 근대화의 길에 접어들게 된다(메이지 유신으로 천황이 실제적인 권력을 가지게 된 것도 아니고, 메이지 유신이 바로 근대화를 위한 것도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다). 메이지 유신에서 이어진 일본의 근대화는 유럽 몇 개국과 미국을 제외하면 매우 이례적인 사회변혁이었다. 그것 자체로도 매우 관심을 가질 만한데, 이러한 메이지 유신에서 비롯한 일본의 근대화가 조선의 식민지화로 이어지기 때문에 우리는 더더욱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어떻게 그들은 그럴 수 있었을까?
당연히 메이지 유신이 일본에서 가능했던 이유는 매우 복잡하며 연구도 무지무지 많을 것이다. 일본과 일본인에 대해서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경제적으로, 인물의 관점에서 등등 모든 방면에서 다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손쉽게 이해할 수 있는 사건, 혹은 흐름이 아닌 셈이다. 박훈 교수는 그 거대한 질문에 모든 답을 찾기보다는 ‘대외 인식과 정치사적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 서양의 발전과 팽창에 대한 일본의 반응이 어떠했는지, 겉보기에 막강했던 도쿠가와 막부가 왜 맥없이 무너졌는지, 17, 8세기 일본에서 유학(儒學)의 확산이 메이지 유신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중심으로 메이지 유신이 가능했던 이유를 분석하고 있는 것이다(그전에 도쿠가와 막부 체제에 대한 개략적인 설명부터 하고 있다).
서양 문명에 대한 일본의 반응은 ‘과장된 위기 의식’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실질적인 위협이 이뤄지지 않는 상황에서 이미 일본에서는 호들갑스러울 정도의 위기 의식이 있었다. 사소한 문제를 구실로 삼고 위기감을 조성했다고도 볼 수 있는데, 그러한 호들갑의 주된 원인으로 도쿠가와 막부의 성립 이래 200년 간 거의 절대적인 평화가 이어져 온 상황을 들고 있다. 도구카와 막부 시대에는 군사적 위기 상황이 거의 없었다. 사무라이는 여전히 칼을 차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가문에서 내려오는 잡다한 업무를 처리하는 ‘리(吏)’의 역할로 전락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런 평화 시기였기에 외부의 작은 위협도 과정 된 위기감으로 연결되었고, 안보 개념이 바뀌면서 위기감을 부채질했다. 안보상의 고립감, 서양에 된 상대적으로 풍부한 정보, 일본인의 정체성 등이 결합하여 일본은 서양 문명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었던 것이고, 이것이 메이지 유신으로 이어진 하나의 배경이 되었다.
그러나 도쿠가와 막부는 겉으로 보기에 굉장히 탄탄한 체제였다.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지니고 있었기에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실제로는 맥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여기에는 무력 충돌을 최소화하고 자신의 해체를 용인한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와 그의 측근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실제로는 막부 체제가 허약해진 데에도 이유가 있었다는 것이 박훈 교수의 분석이다. 도쿠가와 막부 말기에는 허약한 쇼군들이 등장으로 인한 리더십이 상실되고 있었다. 요시노부는 매우 능력 있는 인물이었지만, 이미 상실된 리더십을 돌이키기에는 이미 늦었던 것이다. 또한 막부 체제의 실질적인 행정을 담당했던 로주 권력은 종소 번 출신이라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고, 그마저도 점점 약체화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래서 분출하는 막강한 번들의 도전에 힘없이 권력을 내주고 말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샤쓰마나 조슈와 같은 번들의 세력은 어떻게 막부에 도전할 수 있었을까? 그동안 잠잠했는데... 박훈 교수는 이를 서양의 충격에서만 찾는 게 아니라 일본 사회의 내재적 흐름에서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일본에서 유학이 확산되면서 ‘사대부적 정치 문화’가 형성되면서 그것이 사회 변혁의 동력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물론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이 흐름이 일거에 사라지고 말았지만). 200년에 걸친 평화의 시기에 사무라이는 힘을 잃고 있었다. 과거제도도 없는 상황에서 권력의 중심부로 들어갈 틈새도 없었고, 국가(여기서는 번을 의미)나 천하(일본)의 대사를 논할 능력도, 의지도, 기회도 없었다. 그러다 유학이 들어왔다. 유학의 가르침은 단순한 실무 능력이 배가가 아닌 좀 더 큰 논의를 가능하게 했다. 유학을 배운 이들은 천황과 쇼군의 관계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유학의 가르침은 분명 군주는 천황이고, 쇼군은 군주의 신화임을 가리키고 있었던 것이다. 사무라이가 사화(士化)하면서 전에 없던 국가 대사에 대한 참여를 시도하게 되었고, 이것이 사회 변혁의 동력으로 작용하였다. 유학이 사회의 새로운 흐름이 되면서 “사대부적 정치 문화와 유학적 정치사상이 서구화에 장애물이 아니라 가교 역할”을 하게 되는, 청이나 조선과는 아주 다른 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메이지 유신은 그 이후 일본에서의 여러 차례의 변혁(또는 변화)의 특징과 일맥상통한다. 유럽을 비롯한 다른 국가에서의 변혁이 주로 외부 세력에 의해서 이뤄지면서 엘리트층의 타도가 이뤄진 데 반해, 메이지 유신은 전적으로 지배층의 주도 하에서 일어났다. 지배층의 일부(소외되었다고는 하지만 막강한 세력을 가졌던)가 주도했기에 구체제가 완전히 일소되지 않았다. 박훈은 이후의 일본이 일관되게 이러한 패턴으로 자국의 문제를 해결해왔다고 보고 있다. 분명히 일당 체제가 아니면서도 수십 년간 한 정당의 집권과 그 내부에서의 교체만을 용인해온 일본 정치를 보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대목이다. 이러한 패턴의 효율성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과연 이게 옳은 길인가, 우리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가 등에 대한 판단은 쉽지 않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