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최고의 역사가 중 한 명인 (‘~중 한 명'이라는 표현은 주로 그 사람이 최고가 아니라는 뜻으로 쓰이지만, 여기서는 좀 다르다) 에릭 홉스봄의 ’역사 속의 삶'에 대한 평전이다. 그는 생애 말년 영국 공산당이 붕괴되기 전까지 당원 자격을 유지했던 마르크스주의자였다. 하지만 그는 교조적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으며, 영국 공산당과는 노선을 달리 했으며, 무엇보다 지적 체질이 달랐다(영국 공산당은 지식인을 경원했다). 그런 그의 정치적 입장 때문에 곤란한 상황이 많았지만 죽을 때까지 자신의 신념을 유지했던 역사가였다. 그렇지만 그가 평가받는 것은 그런 일관된 신념 때문이 아니라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된(그리고 그럴 만한 가치가 충분한) 여러 대중적 역사서를 통해서이다. '시대 3부작'으로 일컬어지는, 『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와 같은 '장기 19세기'를 다룬 저서들 뿐만 아니라, '단기 20세기'에 대한 『극단의 시대』 등은 광범한 자료에 바탕을 두고 탁월한 분석력과 생생한 문장력으로 전 세계의 수많은 독자들(역사학자, 역사학 지망생을 포함하여)을 불러 모았다.
우리나라에는 『미완의 시대』로 소개된 『흥미로운 시대』라는 자서전이 이미 있다. 하지만 자서전이라고 하기에는 자신의 개인적인 삶에 대한 얘기보다는 공적인 삶과 그가 살아온 20세기에 대한 평가를 주를 이루었다. 지극히 '비(非)개인적인' 자서전이었기에 에릭 홉스봄이라는 역사가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기에는 부족했다. 2014년 당시 『미완의 시대』를 읽고 쓴 나의 독후감에도 홉스봄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보다는 그가 살아간 시대에 더 많이 읽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http://blog.yes24.com/document/8274826).
그래서 이 평전은 자서전과는 다른 가치가 있다. 평전을 쓴 리처드 에번스는 홉스봄의 자서전 『흥미로운 시대』을 대체하려는 의도가 없다고 하고 있는데, 자서전의 보완이라는 측면을 넘어서 자신이 아닌 다른 이의 시각에서 홉스봄이라고 하는 역사에 대해 쓴 한 사람, 그것도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책은 두껍다. 그 이유를 리처드 에번스는 홉스봄이 오래 살아서라고 쓰고 있다. 100세 가까이 살았으며 50년 이상 왕성한 활동을 했기에 그만큼 쓸 내용이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잘 읽어보면 단순한 살아간 기간, 활동의 기간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기간 동안 그의 활동은 다양했으며 깊이가 있었다. 그의 견해에 대해 찬성과 반대에 대한 논란이 있었으며, 그가 낸 책에는 많은 서평이 뒤따랐다. 그랬기에 그것들을 모두 담은 평전은 길어질 수 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일기, 편지, 미간행 원고에다 여러 기록물 센터에 남아 있는 기록물들을 망라하여 홉스봄의 삶의 재구성하였다는 점도 이 책이 이렇게 방대해진 이유이기도 하다.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 불우한 어린 시절을 거쳐(그는 열네 살에 고아가 되었다), 나치가 정권을 잡은 베를린에서 단체 활동 등을 통하여 마르크스주의를 접하고, 그것만이 나치즘에 대항할 수 있음을 깨닫고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 영국으로 이주한 후 케임브리지대학 킹스칼리지에 진학하여 '뭐든지 아는 신입생'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다양한 학생 활동을 하였으며, 2차 세계대전이 터지고는 징집되었다. 전후 진로로 언론인 등도 생각했으나 결국엔 역사학자로서의 길을 걷게 되었고, 처음부터 놀랄만한 업적을 내놓았다. 그러나 그는 거의 죽을 때까지 영국 첩보기관의 감시 대상이었으며, 그 이유를 포함한 여러 이유로 케임브리지대학에 임용되지 못하고 결국엔 성인 대상의 야간대학인 버크벡대학에 자리를 잡고 정년퇴임 때까지 강의를 하게 된다. 사실 이런 불운(?)은 그에게 역사저술가로서 행운으로 작용하는데 낮 동안의 시간을 활발한 연구 활동과 저술 활동에 쓸 수 있었다. 그는 앞에서 말한 "시대" 3부작을 통해서 전 세계적인 역사가로 떠올랐으며, 또한 베스트셀러 작가였다. 한 가지 굉장히 흥미로운 사실은 전후에 재즈 전문가로서 글을 쓰고 방송 활동을 했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68년 혁명에는 비관적인 시각을 가졌으며, 페미니즘에도 거리를 두었다는 것 역시 조금은 갸우뚱거려진다(아무래도 전선이 흐려진다는 생각했기 때문인 듯하다).
그의 책은 전 세계의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또한 전 세계를 무대로 강연을 하고 활동했다. 오히려 영국에서 그가 더 비판을 받고 명성이 덜했다고 볼 수 있을 정도인데, 특히 브라질에서의 그의 명성과 위치는 주목할 만하다. 그의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관심과 연결될 수 있을 것 같은데, 대통령이 되는(또다시 대통령이 될 것으로 보이는) 룰라와의 인연 역시 흥미롭다.
그는 스스로를 이렇게 평가했다.
“나는 무엇보다 스스로를 일종의 게릴라 역사가로, 이를테면 포격을 퍼붓는 문서고의 뒤편에 놓인 목표물을 향해 곧장 진격하기보다는 측면의 덤불에서 사상의 칼라시니코프 소총으로 목표물을 공격하는 역사가로 묘사하고 싶다. 기본적으로 나는 새로운 질문을 제기하고 새로운 영역을 열어젖힘으로써 기존의 논의에 신선한 시각을 적용하려고 노력하는 호기심 많은 역사가, 또는 문제 지향적인 역사가다.”
이 책은 홉스봄이라고 하는 '문제 지향적인 역사가'에 대한 위인전이 아니다. 그의 과오라든가 잘못된 판단, 개인적인 삶의 오점들에 대해서 감추지 않고 있으며 저자의 견해도 분명하게 전달되고 있다. 역사에 대해 쓴 역사적 역사가로서 그 오점들마저도 평가받아야 하고, 토론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이 평전을 그 기초 자료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