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재 박사는 모델생물에 대한 책 『선택된 자연』에서 정작 초파리를 제외하면서 “생물학의 가장 위대하고 유명한 모델생물”이라고 쓰고 있다(김우재 박사의 전공이 바로 초파리이다. 그리고 이미 초파리에 대해서만 쓴 『플라이룸』을 냈기 때문에 초파리에 대해서 쓰지 않았다). 본인이 다루는 생물이라 그렇게 평가한 것이라 볼 수도 있지만, 초파리를 다루지 않는 입장에서도 그다지 반박할 수 없다. 그만큼 초파리는 생물학에 커다란 기여를 해왔다(비록 지금은 그 기여도가 많이 줄어들어 가는 게 사실이지만).
마틴 브룩스의 『초파리』의 부제도 그렇다. “생물학과 유전학의 역사를 바꾼 숨은 주인공”. 책의 부제가 어느 정도의 과장은 용인되는 걸 감안하더라도 이 말은 그대로 받아들이더라도 크게 잘못된 말이 아니다. 초파리는 가장 많은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는 것 자체만 보더라도 초파리가 현대 생물학에 미친 영향을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마틴 브룩스는 이 초파리 연구에 관한 굵직굵직한 내용들을 이 한 권에 담아내고 있다. 20세기 초반 헌트 모건이 초파리를 만남으로써 이뤄낸 업적으로 현대 유전학이 꽃을 피우기 시작한 장면과, 사회주의자로서 굳은 신념은 가졌던 멀러가 X선을 이용하여 초파리에서 인공 돌연변이를 일으키는 방법을 개척함으로써 유전학 연구의 새로운 전기가 마련된 장면은 아주 오래된 얘기 같지만, 지금도 유전학 교과서에서는 유전학을 이해하는 데 기초적인 내용이 되고 있다.
모건과 멀러 이야기를 이어서 모건의 제자인 도브잔스키가 등장한다. 러시아 태생의 도브잔스키에 대해 마틴 브룩스는 “가장 위대한 ‘중간형’ 생물학자”라고 평가하고 있다. ‘중간형’이라는 것은, 과학자를 실험실에서 연구하는 과학자와 야외해서 일하는 과학자로 구분할 수 있을 때 그 중간형이라는 얘기다. 이 희귀한 유형의 과학자 중 대표인 도브잔스키는 실험실에서도, 야외 작업에서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 과학자이다. 초파리 연구를 통해 유전학과 진화학을 엮어냄으로써 ‘진화유전학’이라는 분야를 만들어냈다. 너무 오랜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에 직접 확인할 수 없다고 여겨졌던 진화를 눈앞에 드러내 보인 것도 도브잔스키였다(그의 “Nothing in biology makes sense except in the light evolution.”은 진화에 관한 최고의 명언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가 이룩한 과학적 업적은 거의 전적으로 초파리를 통한 것이었다는 것은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그 다음으로 등장하는 과학자는 시모어 벤저다. 물리학자로 출발하여 생물학자가 된 시모어 벤저는 인간 행동의 근원을 탐구하고자 했다. 그 목표를 위하여 고른 생물이 바로 초파리였다. 그는 초파리를 통해 행동을 유전적으로 탐구하고 분석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이렇게 초파리의 분야가 유전학, 진화학을 거쳐 행동 연구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학습과 기억에 대한 연구, 생체 리듬에 대한 연구 등이 시모어 벤저의 초파리 연구에서 비롯되었다.
시모어 벤저를 끝으로 전설적인(!) 초파리 연구자들에 관한 이야기는 끝이 난다. 대신 보다 최근의 연구에 대한 이야기가 소개되는데, 초파리의 짝짓기, 즉 성생활에 관현 연구, 노화에 관한 연구, 종 분화에 관한 연구 등이 그것들이다. 이런 연구들은 그저 초파리 자체를 이해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이해로 이어지는 것이란 것은 당연하다. 실제로 초파리에서 밝혀진 것을 토대로 인간의 행동과 유전을 이해하는 데 쓰인다. 바로 그게 모델생물의 가치이기도 하다.
이 책(원서)은 2001년에 처음 출판되었다. 그러므로 21세기의 연구 성과를 담지는 못했다. 하지만 초파리가 일군 현대 생물학과 유전학의 역사를 확인하는 데는 이보다 적절한 책은 없다. 2002년에 이마고에서 처음 번역해서 나왔고(나는 이 책을 2010년에 읽었다), 2013년에는 갈매나무에서 냈었다. 2022년 개정판이 나온 셈인데,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다. 다시 읽을 가치가 있는 책, 20년 전 책이라도 읽어야 할 좋은 책은 이렇다. 이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