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슬좋은 부부가 오셨습니다.
"원장님 틀니를 좀 하러 왔습니다."
여환자분의 입에서 꺼낸 틀니는 그동안 제가 치과의사를 하면서 보지 못하던 형태의 것이었습니다.
"이 틀니가 왜 이렇게 생겼죠? 형태가요."
원래 치아는 씹는면이 울퉁불퉁합니다. 그래야 음식이 잘 찢기고 씹히기 때문이지요. 틀니의 치아는 레진이라는 재료로 만들어지기때문에(약간 플라스틱과 유사한 성질입니다.), 점차 씹을수록 닳아져갑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좀 덜 씹히게 되지요. 그런데 이 여환자분께서 가져온 틀니를 보니 씹는면이 운동장처럼 평평합니다. 식탁의 테이블 상판처럼요. 틀니 안의 구조도 심플하고 단순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보아하니 임시치아로 보입니다.
"원장님, 이건 제가 부산에서 20년 전에 만든 임시틀니에요. 그동안 돈이 없어서 새로 해넣지를 못해서 이렇게 닳았네요."
옆에서 남편이 말합니다.
"아내가 소화가 안되어서 늘 배가 아픕니다. 이번 기회에 새로 틀니를 해야합니다. 새로 틀니를 하려면 얼마입니까?"
"네, 보통 직장인 한달 월급정도 되는 돈입니다."
"원장님, 그럼 비싸서 못하는데.. 우린 그런 돈이 없어요."
여환자분이 말합니다.
"당신 소화가 안되어서 배가 아프잖아. 이번 기회에 해야되요. 해. 그냥."
"돈이 없잖아요? 다음에 와요. 오늘은 그냥 갑시다."
제 앞에서 실갱이가 벌어집니다. 가끔 이런 광경을 볼 일이 있습니다. 오늘은 마음이 무겁습니다. 임시틀니라는 것은, 썩고 못쓰게 된 치아를 뽑고 나면, 그 즉시는 잇몸의 형태가 분화구처럼 생겨있으니, 좀 기다리는 시기에 쓰는 틀니입니다. 이를 뽑고나면, 치아가 원래 박혀있던 턱뼈의 모양은 움푹한 웅덩이처럼 함몰되게 됩니다. 이것이 한달 이상 지나면, 잇몸살이 차올라서, 승마할 때 타는 말의 안장모양으로 아물게 되는데, 그 기간동안에 치아는 없고, 틀니를 만들수도 없으니 임시로 쓰는 틀니입니다. 보통 한두달 사용하고 버리기 때문에, 좀 덜 튼튼하게 만들고, 좀 덜 맞을 수 밖에 없는 틀니입니다. 잇몸의 형태가 변해가는 동안에 쓰는 틀니이기에 그렇습니다.
20년간 사용한 임시틀니입니다. 두달정도 쓰면 충분한 것을 20년동안 저 평평한 씹는면의 틀니로 씹었으니 음식이 덩어리째 삼켜져서 위장에 탈이 안나기가 어렵습니다.
서로 저와 한참을 상담실에서 상의하여 새로 틀니를 해드리기로 하였습니다. 좀 값을 싸게 해드리면, "당신이 내가 돈을 적게 내어서 더 무성의하고 나쁜 재료로 만들어줘서 틀니가 불편한거 아니에요?" 하고 말씀하시는 환자분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래도 그런 불만마져도 이제는 저도 웃어넘길만큼 마음의 여유가 생겼습니다. 세월은 그냥 내 몸에 쌓여가는게 아닌가 봅니다.
제가 긴 시간을 상담실에서 이야기를 하니, 환갑이 넘으신 남편되시는 분께서 말씀하십니다.
"저는 척추수술을 3번 받아서 일을 못하는 처지이고, 아내도 관절수술, 항암수술을 하여서 벌이가 없습니다. 사실 저는 젊었을적에 북파공작원(남한에서 북측에 보내는 일종의 간첩같은거라고 합니다.)이었어요. 어금니에 독약을 장착하고 파견되었습니다. 5년을 군인으로 근무했죠. 북쪽에 침투했다가 잡히면 어금니에 달린 독약에 실이 달려있었는데, 그 실을 잡아당기면 독약이 퍼져서 자살하게끔 되어있었습니다. 밥 먹을땐 당연히 지장이 없었죠. 그런데 제대하게 되었을때, 그 어금니에 독약 부착장치가 달려있었는데, 그 어금니를 뽑아버리더라구요. 그래서 지금까지 어금니가 아래턱에 좌우측 한개씩 없습니다."
실제로 제가 보니 어금니가 없습니다. 아내분께서는 남편이 워낙에 거친 성격이라서 북파공작원으로 선택된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마음씨좋은 어르신처럼 보이는데 말이죠.
저는 틀니와 임플란트, 보철등을 다루는 치과의사이다보니, 당장에 밥을 먹는데 심각한 지장이 있는 환자분들이 오셔서 비용문제로 고민하며 곤란해할때 저도 마음이 참 무겁습니다. 그래도 어찌보면 이렇게까지 곤란한 분들을 내가 마음먹으면 조금은 나은 상황으로 만들어줄 수 있다는 것도 큰 복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런 고민속에서 사는 것이 일상이다보니, 어떤 정신과의사선생님은,
"당신이 세상을 구할 수 있다는 헛된 망상이 당신을 너무 괴롭히게 놔두지는 마세요."라는 말도 합니다. 그 말이 저에겐 어떤 위안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저 작은 존재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좀 편안해지는 것도 느꼈습니다. 그래도 이제 몇년 뒤면 나이가 50이 되고, 세상을 보면서 마음이 불안하거나 불만이 있거나 하지 않고 그냥 내 자리에서 작은 문제들을 풀어갈 수 있음에 감사할 수 있는 단계까지는 성숙했음에 스스로가 대견하기도 합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이 양치도 좀 더 신경쓰시고, 매년 귀찮으시겠지만 치과 정기검진도 잘 받으셔서, 이런 환자분처럼 아주 곤란한 지경까지는 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