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규의 『카스테라』를 읽고
주인공이 중고가전상에서 사 온 냉장고는 한 채의 공장이 내뿜을 만한 소음을 내뿜는다. 소음의 원인을 찾기 위해 냉장고를 공부하던 주인공은 ‘냉장의 원리’에 빠져들게 되고, 무언가를 냉장 보관할 수 있다는 것에 매력을 느낀다. 그리고 『걸리버 여행기』와 아버지, 어머니를 시작으로 아주 소중하거나 아주 해악인 것을 냉장 보관하기 시작한다. 중국을 집어넣은 세기의 마지막 날 아침, 이상하게도 냉장고의 소음이 사라진다. 그 안에는 카스테라 한 접시가 덩그러니 놓여져 있다.
『카스테라』
1. 인간소외의 현상 속에서 냉장고와 친구가 되다
인간소외란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는 인간성을 박탈당하여 비인간화되는 현상을 일컫는다. 작품 속에서 화자는 사람 간의 관계를 맺지 못하고 '불쾌할 정도의 외로움'을 느끼는 평범한 대학생이다. 그는 친구를 찾는 대신에 냉장고를 의인화하고 그에게 호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의 냉장고는 곧 훌리건의 부활이 되고, 엄청난 소음은 곧 그의 발언권이 된다. 작가는 타인과의 관계가 단절된 인간소외의 현상 속에서 도리어 사물에게 온정을 느끼고 교감하는 과정을 통해 현 세대의 모순성을 드러낸다.
“나는 늘 불쾌할 정도로 외로웠다. 즉 그런 연유로 냉장고와 나는 친구가 되었다. … 드넓은 세상에서 우리는 늘 인간만이 살고 있다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조금만 더 신경을 기울이면, 바로 자신의 곁에 <냉장고>가 있음을 알 수 있다. / 냉장고는 인격(人格)이다.”
2. 카스테라, 마지막 한 조각의 희망
한 세기가 지나간 다음 날 아침, 냉장고에 덩그러니 놓여져 있는 카스테라는 따뜻하고,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을 정도로 맛있고, 아주 단순하다. 이러한 묘사는 화자가 지금껏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그 모든 것들(부모, 책, 학교, 정치인, 미국…)의 특징과 확연하게 대비된다. 그러므로 카스테라는 그동안 '냉장고', ‘냉장 보관’이라는 소재를 통해 신랄하게 풍자되었던 사회의 요소들과 대비되는 개념, 즉 다양한 사회 문제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아있는 인간적 가치를 의미한 것이 아닐까 싶다. 이에 대한 더 자세한 해석은 작가의 말에서 확인 할 수 있다.
“결국 인간이 없었다면, 나는 소설 같은 건 쓸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같은 이유로, 이 한 조각의 빵을 당신에게 바친다. 아니 바친다기보다는, 당신의 냉장실 중앙에 조용히 내려놓았으면 한다. 겨우 한 조각의 빵을 만들었다. 더 열심히 쓰겠다. … 아주 많은 사람들이 아주 많은 형태의 카스테라를 만들고, 먹어왔다고 한다(당연한 얘기라니까).”
이 대목이 『카스테라』라는 소설집 전체를 관통하는 말인 듯하다. 그의 소설 자체는 냉소적이고 비판적이지만, 적어도 ‘따뜻한 카스테라 한 조각은 만들어 두었다’. 결국 인간이 존재하는 한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은 언제나 있다. 그러므로 카스테라는 인류의 마지막 희망, 우리가 존재함으로써 가능성이 있는 희망이다.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1. 각자의 산수, 시급과 월급에 따라 돌아가는 지구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는 자본주의 시스템과, 그 속에 묶인 무기력한 개인들의 일상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작품이다. 주인공은 언제나 '자신만의 산수'에 따라 살아가며, 그의 아버지를 포함한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도 그렇게 살아간다. 세상은 각자의 이익에 따라 수학적으로, 산술적으로 돌아가는 곳이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지하철의 성추행범, 월급을 떼먹은 편의점 사장 등은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계산법에 따라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모습, 즉 사회의 부조리함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인간에겐 누구나 자신만의 산수가 있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것을 발견하게 마련이다. 물론 세상엔 수학(數學) 정도가 필요한 인생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삶은 산수에서 끝장이다. 즉 높은 가지의 잎을 따먹듯 – 균등하고 소소한 돈을 가까스로 더하고 빼다보면, 어느새 삶은 저물기 마련이다, 디 엔드다. 어쩌면 그날 나는 <아버지의 산수>를 목격했거나, 그 연산의 답을 보았거나, 혹 그것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즉 그런 셈이었다. 도시락을 건네주고, 산수를 받는다. 도시락을 건네주고, 산수를 받았다. 그리고 느낌만으로 <아버지 돈 좀 줘>와 같은 말을 두 번 다시 하지 않는 인간이 되었다.”
또한 "우주에서, 행성 위에서 왜 고작 이따위로 사는 걸까요?", "왜 세상엔 <푸시맨>만 있고 <풀맨>이 없는 것인가?”와 같은 화자의 단순한 질문들은 현대 사회의 보편적인 모순점들에 대한 본질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장치로 볼 수 있다.
2. '푸시맨', 자본주의라는 괴물 속에 사람을 밀어 넣는 일
2020년 한국에서는 더 이상 볼 수 없지만, '푸시맨'이라는 직업은 존재 그 자체로 지극히 상징적이다. 이 작품은 화자가 푸시맨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광경, 매일 아침 지하철 플랫폼에서 마주치는 자본주의의 처절한 폐해를 묘사하고 있다. 모든 직장인이 인파를 뚫고 출근하기 위하여 사투를 벌인다. 지하철이 미어터지도록 이들을 밀어 넣어야 하는 주인공에게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 하나의 부품이고 덩어리이다. 그리고 화자는 점점 이에 익숙해진다.
“처음 열차가 들어오던 그 순간을 나는 잊을 수 없다. 그러니까 열차라기보다는, 공포스러울 정도의 거대한 동물이 파아, 하아, 플랫폼에 기어와 마치 구토물을 쏟아내듯 옆구리를 찢고 사람들을 토해냈다. 아아, 절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뭔가 댐 같은 것이 무너지는 광경이었고, 눈과 귀와 코를 통해 머릿속 가득 구토물이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야! 코치 형이 고함을 질러주지 않았으면, 나는 아마도 놈의 먹이가 되었을 테지. 정신이 들고 보니, 놈의 옆구리가 흥건히 고여 있던 구토물을 다시금 빨아들이고 있었다. 발전(發電)이라도 일어날 기세였다. 힘! 그때 코치 형이 고함을 질렀다. 해서, 엉겁결에, - 영차, 영차 무언가 물컹하거나 무언가 딱딱한 것들을 마구마구 밀어넣긴 했지만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는 지금도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 어찌 내 입으로 그것이 인류(人類)였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박민규의 작품세계 속으로
1. 유쾌함 속 허무함, 그러나 한 조각의 희망
두 편의 작품, 그리고 소설집 전체를 아울러 작가는 주로 소수자와 경제적 약자를 화자로 등장시킨다. 그리고 특유의 덤덤한 문체로 그들의 경쟁과 아픔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큰 굴곡이 없는 감정선, 짧은 구어체의 문장들은 독자가 주인공의 무기력함에 보다 공감하게 만든다.
박민규의 소설은 솔직하고 유쾌하다. 시대 현실과 관련된 무거운 주제들을 다루지만 톡톡 튀는 발상과 재치있는 문장들 덕분에 끝까지 재미있게 읽게 된다. 하지만 풍자와 해학으로 가득 찬 책을 덮고 나면 어딘가 허무하고 찝찝하다. 소설은 해피엔딩이 아니고, 방금 재미있게 읽은 내용들은 우리가 사는 현실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가는 이 소설집의 제목을 ‘카스테라’라고 짓고, 작가의 말을 통해 다시 한번 카스테라의 의미를 언급함으로써 작품의 종지부를 찍은 것 같다. 박민규의 소설은 사회의 부조리함을 낱낱이 고발하면서도, 여전히 남아있는 어렴풋한 희망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더욱 긴 여운을 남긴다.
2.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재정의
위의 두 작품에서 작가는 ‘냉장고'와 '푸시맨'이라는 당시의 일상적인 소재를 통해 사회의 문제를 풍자적으로 고발한다. 각각의 소재는 기존의 관념을 벗어나, 세계를 보관하는 그릇이 되고 매일 인류의 참상을 대면하는 문지기가 된다.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대상을 재해석하는 상상력은 작품에 새로운 재미와 독창성을 더한다.
또한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비롯한 다수의 작품에서 대중문화적인 소재, 대상, 배경이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주인공이 즐겨 찾거나 다른 인물과의 대화를 나누는 호프집과 레코드 가게 등이 그렇다. 작가가 즐겨 사용하는 대중문화적인 코드는 독자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친숙함을 더하는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3. 비현실적인 소재와 몽환적인 세계
박민규의 작품에는 날아다니는 오리배, 귀가 자라는 쥐와 같이 비현실적인 소재가 자주 등장한다. 화자는 현실과 환상, 공상의 세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그 경계를 허물어 버린다. 『카스테라』의 주인공이 다양한 사물, 사람, 국가를 모두 냉장고에 넣어버리는 장면에서,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의 주인공이 기린으로 변한 아버지와 마주하는 장면에서 이러한 특징이 잘 나타난다.
그는 사회의 부조리함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현가능한 대안을 제시하기보다는, 지극히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이미지로 작품을 끝마친다. 그 공상은 『카스테라』와 같이 낙관적인 희망을 의미할 수도 있고,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와 같이 작품의 비극성과 여운을 극대화시키는 장치일 수도 있다.
강의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차미령 문학평론가는 박민규의 작품에 대해서 “익숙한 것들을 아주 낯설고 비현실적인 위치에 가져다 놓음으로써 빚어지는 그 환상은, 현실에 지친 인간들을 가만히 다독여주는 동시에 비참한 현실을 환기하면서 애잔한 감동을 전해주는 데 성공한다”고 말했다. 박민규는 자유로운 상상력을 발휘하고 이를 현실과 자연스럽게 결합시킴으로써 소설적 아름다움을 더하고, 추상적이지만 확실한 메시지를 전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