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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리스 Jul 16. 2024

3. "선풍기 틀고 자면 죽어"랬더니 외국인이 하는 말

한국 국적을 가지고 80년대에 한국에서 태어나

국민학교를 졸업해 수능시험을 보고 대학을 다닌 토종 한국인이라면

어렸을 적 한 번쯤은 이런 경험이 있었을 것이다.


아주 무더운 여름,

에어컨도 귀하던 시절,

비비드하게 푸른 모기장 재질의 천으로 덮어씌운 녹슨 철제 망 사이로 파란 날개가 털털 거리며 돌아가던 골드스타(옛 엘쥐) 선풍기.


내 머릿속 이미지


이건 매우 시끄러웠지만 요긴했고

머리 방향을 이리저리 억지로 돌리려다 목도 몇 번 부러뜨리면서 누가 누가 독차지하나 형제들하고 많이들 싸웠더랬다.


특히 밤에 누가 선풍기를 차지하느냐가 매우 중요했는데 나는 2살이나 어리다는 핑계로 오빠를 밀쳐내 선풍기를 차지했었다. 하지만 낮 동안 아스팔트를 매섭게 달구던 여름날의 햇볕은 해가 지고서도 쉬이 식지 않았고, 선풍기 독점이 무의미할만큼 깜깜한 밤 흐르는 땀에 뒤척이느라 잠에 들지 못했다.


그러다 어렵사리 설핏 잠이 들기도 했는데, 그마저도 1시간이 안되어서 깨고 말았으니. 이유인즉슨 분명 발아래 털털 거리며 돌아가던 선풍기가 어느 순간엔가 가만히 멈춰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장은 아니었다. 분명 누가 의도적으로 끈 것이었다!

나는 잠을 설쳤다는 짜증과 선풍기를 차지한 위너의 권한을 무시받았다는 억울함에 반항하듯 벌떡 일어나 송풍 혹은 약풍 버튼을 꾹 누르고 소리를 빽 지르곤 했는데, 그러면 바로 불호령이 떨어졌다. 그것도 등짝을 스매싱하는 매운 손길과 함께.



"당장 안 꺼! 선풍기 틀고 잠들면 죽어!!!"



부모님의 말을 의심 없이 믿었던 건

실제로 TV 뉴스에서도 신문에서도 누군가가 더위를 못이겨 선풍기를 틀어 놓고 자다 죽었다는 기사를 여름이면 연례행사처럼 쏟아냈기 때문이다.


진짜 이런 뉴스가 있었다구.. 무려 공영방송에서!



이를 보고 나는 생각했다.


선풍기를 틀고 자면

방 안의 산소가 없어져 나도 모르게 질식해 죽게 되거나

선풍기 바람으로 체온이 낮아지면서 저체온증으로 죽게 된다고.


그리고 나는 마흔이 된 지금도

이 모든 내용이 과학적 근거가 없는 속설일 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찝찝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 여전히 선풍기는 틀지 않고 잠을 다.






한국에서 아는 친구 집에 머무르고 있는 마크는

열대야가 심하던 날 밤 잠을 이루지 못해

모기밥이 되는 것을 무릅쓰고 온 방의 창문을 열고 선풍기를 틀고 잤다는 얘기를 무용담처럼 떠들어댔다.

 


"!!!! 진짜 나 온몸이 다 물렸! (I got so  many mosquito bites!) 다음엔 문을 닫고 자야지!"

"설마 풍기를 틀고 잔다는 건 아니지?"

"왜? 에어컨도 없는 방인데 선풍기라도 있어야지!"

"미친! 너 그러다 죽어!!"

"엥?"

"너 fan death 몰라? fan death!!!!!"


마크는 fan death 란 말에 배꼽을 잡고 깔깔 웃었다. 나는 그 반응에 너무도 억울해서  미천한 영어 어휘력으로  문을 닫고 선풍기를 트는 행위가 왜 위험한 지를 설명해야만 했다.

공기 부족! 체온 감소!


그래도 마크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No way~ 하면서 손사래를 쳤다.

그래도 여전히 내가 고집을 꺾지 않자 팩트로 대꾸하겠다는 듯 구글링을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킬킬대며 폰을 들어 보여줬다.


"You're right!"

"그 봐 맞지?"
"That's not what i mean... Wikipedia say, 'The belief in fan death persisted to the mid-2000s in South Korea.'"

"뭐라고?"

"그러니까 네가 말한 거 진짜이긴 한데, 사실은 아니라고!"


놀랍게도 키피디아 영어버전에는 선풍기 틀면 죽는다는 내용을 한 면 가득히 조목조목 서술하고 있었다. 그것도 한국의 미신(myth)이라는 황당하고도 불쾌한 말로..



위키피디아



"난 이게 미신이었다는 것도 놀랄 일이지만 한국에서만 '선풍기 사망'을 믿고 있었다는 게 더 충격이다."

"난 네가 그걸 믿고 있다는 게 더 충격이다."

...

"근데 진짜 왜 이런 미신이 퍼졌을까."

"여기에 이런 얘기가 있네. One conspiracy theory is that the South Korean government created the myth as propaganda to curb the energy consumption of South Korean households during the 1970s energy crisis.(즉, 한국 정부가 국민들이 밤새 선풍기를 켜놓고 잠을 자는 방식으로 전기를 축낼까 봐 일부러 선풍기 사망설을 퍼뜨리고 선동했다는 이야기)"

"에이 설마. 정부가 설마..."

"Who knows.."










몸과 마음을 갈아 만든 스타트업 <로즐린>이
벤처인증 이후 올리브영의 K-BOX 브랜드로 선정되면서 사업 차 한국에 방문하는 외국인을 만나는 일이 잦아졌다. 덕분에 향 원료와 제품 제조, 마케팅 등에 대한 시야가 넓어지는 경험을 하는 중인데 일 말고도 외국인을 만난다는 것 자체가 나에겐 또 다른 기회이자 도전이 되었다. 특히  이곳, 한국의 맨얼굴을 외국인의 입장에서 자주 마주하는 일은 많은 고민거리를 가져온다.

나에게는 일상이어서 익숙했던 것들이 그들의 관점과 시선에서는 신기하고 흥미롭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그럴 때면 나는 마치 문화인류학 박사처럼 혹은 한국 문화 전문가 마냥 그들에게 한국과 한국인, 한국 문화에 대해 설명하며 나 또한 새로운 깨달음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중이다. 

지금 한국은, 
'인류애 상실'이라는 단어가 만연하고 서로를 혐오하고 증오하며 불쾌한 존재로 여기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지만 누가 뭐래도, 내가 겪고 느낀 바로는
한국만큼 안전하고 인정 많고 효율적이고 편리한 곳은 단연코 없다.

물론 복잡하고 스트레스 많고 경쟁적이고 때로는 너무 빨라서 그 속도를 따라기가 벅찰 때도 있다.나도 한 때는 '한국은 싫어', '한국이 최악이야', '이래서 한국은 안돼.' 라며 자조하는 투덜이 스머프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을 스스로 지옥이라고 명명하면 결국 지옥이 되는 법.

이 브런치를 통해 내가 가진 것, 내가 누리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고 감사해하며
좀 더 긍정적으로 나와 주변을 바라보는 기록이자 기회가 되길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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