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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eVet Mar 19. 2021

<잭 스나이더의 저스티스 리그>

마침내 빛을 본 대서사시, 영화에 깊게 밴 추모의 잔향


1. 영화 자체에 관한 이야기를 하자면,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는 다소 힘들었다. <잭 스나이더의 저스티스 리그>(이하 <스나이더컷>)에서도 ‘슈퍼맨의 회생’이라는 사건과, 그가 가진 먼치킨적인 특성을 그대로 가지고 간다. 그 소재들이 태생적으로 가진 맹점을 영화가 온전히 해결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4시간이라는 러닝타임이 모자랄 만큼 그 안에 각 캐릭터의 서사를, 특히 사이보그의 서사를 밀도 있게 녹여내면서 캐릭터들을 좀 더 세심하게 빚어냈다. 플래쉬와 사이보그의 영향력이 눈에 띄게 밸런스를 맞췄으며, 배트맨도 소위 '뱃찐따'를 벗어나 리더 겸 모략가로서 (심지어 꽤 는 액션까지) 본인의 몫을 챙긴다. 특히 플래쉬의 클라이맥스 장면은 압권이었다. 이런 노력 덕분에 슈퍼맨에게만 의지하지 않고 멤버가 모두 빛나는 서사가 됐다. 진일보한 액션은 말할 것도 없고 음악 활용, 캐릭터성, 서사, 감정선 등 모든 지점에서 17년도 판본을 압도하며(비교하기 미안할 정도), 작품의 독창적인 매력에 흠뻑 젖을 수 있었다.



2. <스나이더컷>에 대해 개인적인 오해가 있었음을 보면서 깨달았다. 나는 영화를 보기 전에 <스나이더컷>이 “스나이더의 독자적인 스타일로 여닫는 것이 온전하게 마무리되는 이야기”일 것이라고 나도 모르게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영화는 하나의 이야기로서 독자적으로 마무리된다기보다, 말 그대로 ‘스나이더의 비전으로 창조할 세계관’ 속에 있는 <저스티스 리그>였던 것이다. <스나이더컷>은 그가 지난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에서 뿌려놓은 ‘떡밥’들을 적절하게 회수하면서, 이후에 이어질 새로운 이야기들을 예고하는 위치에 있다. 우리가 <스나이더컷>을 보면 한 편의 영화뿐 아니라 그가 그리려 했던 세계의 청사진을 보게 된다. 그 청사진이 정말 매력적인데, 이제는 만날 수 없을 것 같다는 점이 너무나도 아쉽다.



3. 출처는 기억나지 않는데, 어디선가 영화 속 가장 인위적인 조작에 관해 이야기한 걸 읽은 적이 있다. 거기서 3가지를 언급했었는데 하나는 기억나지 않고 나머지 둘이 클로즈업, 그리고 슬로우모션이었다. 슬로우모션이 잭 스나이더의 인장으로 여겨지는 만큼, 이번에도 여전히 많이 등장한다. 그의 최근작들이 DC의 세계관을 그리려 했다는 것과는 별개로, 그의 작품은 단독 작품으로만 보더라도 항상 영화 속 세계가 매력적이었다. 나는 그 이유가 슬로우모션에 있다고 생각한다. 슬로우모션은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가 가상의 세계임을 인지시키지만, 그 점이 오히려 편하게 세계 속으로 발을 내딛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동시에 슬로우모션은 영화의 영상이 사진에 가장 가까워지는 순간이다. 관객은 영화를 보면서 일종의 ‘사진을 찍는’ 경험을 하게 되고, 이는 영화의 이미지를 뇌리에 새기며 더 오래 간직하게 만든다. 스나이더 영화 속 세계관은 그렇게 관객에게 침투한다.



4. 원래 <저스티스 리그>를 잭 스나이더가 맡았었지만, 딸 어텀 스나이더의 자살로 스나이더가 하차했다. 그 뒤를 조스 웨던이 이어받아 완성한 것이 2017년도 판본의 <저스티스 리그>다. 그에게 <저스티스 리그>의 미완은 딸의 죽음과 결부돼 있었다. 영화 속에서 마샨 맨헌터가 마사 켄트의 모습으로 로이스 레인에게 “너의 삶을 살라”고 이야기하는 장면이 있다. 알지 못하는 존재(혹은 가상의 존재)의 입을 빌려 이야기했지만 그 이야기는 로이스 레인을 변화시켰고, 그 변화는 이야기의 변곡점을 장식했다. 그때 그 말이 스나이더 자신에게 건네는 말처럼 다가왔던 건 왜일까. 로이스 레인의 서사가 그와 연결된 것 같은 이유는 왤까. 사이보그의 서사도 비슷한 지점이 있다. 사고로 아내를 잃고, 아들도 거의 다 죽었던 스톤 박사는 외계의 힘을 빌려서라도 아들을 건강하게 살려낸다. 아버지에 대해 여러 면에서 원망을 하던 사이보그는, 결국 아버지의 희생과 진심을 마주하며 화해하게 된다. '아버지'와 '자식의 상실'이란 테마가 감독의 이야기와 겹쳐 보였던 건 왜일까.


나아가 내겐 <스나이더컷>의 완성이 팬들의 염원 성취만큼이나, 자신의 딸을 위한 추모처럼 다가왔다. 그렇게 느끼던 와중에 영화는 이미 잃어버린 사람과 세상을 구하기 위해 시간을 되돌렸고, 사이보그는 부쉈던 아버지의 진심을 고쳤고, 로이스에게 변화를 불어넣었던 마샨 맨헌터가 지구를 떠나는 장면으로 마무리했으며, “FOR AUTUMN”이란 문구로 끝을 맺었다. 그리고 추모의 정서가 곁든 노래 “Hallelujah”로 엔딩 크레딧을 장식한다. 스나이더가 <스나이더컷>의 흑백 버전 <Justice Is Grey>도 공개한다던 소식을 기억해냈을 때, 내 생각에 조금의 확신을 가지게 됐다. 잭 스나이더, 수고 많았어요. 그리고 어텀 스나이더의 명복을 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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