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갈 집이 없다는 감각

가족은 있어도 귀환지는 없다

by 정연

자취를 시작한 뒤 처음으로 엄마와 연락했다. 살림과 관련한 사소한 것을 물어보기 위해서였다. 대화는 짧았고, 예상 가능한 수준으로 무뚝뚝했다. 필요한 답만 오갔고 끝에는 형식적인 안부가 붙었다. "잘 살아"


잘 묻어두었던 오래된 질문이 다시 떠올랐다. ‘나는 저 사람에게 소중한 존재였나’


사회적으로 가족은 오랫동안 안전 기지의 역할을 수행해왔다. 근대 사회에서 가족은 개인이 시장과 경쟁의 압력으로부터 일시적으로 복귀하는 사적 안전망이자, 정서적 돌봄과 생계의 완충, 실패의 흡수 장치로 기능해왔다. 물론 모든 가족이 실제로 이런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사회는 가족이 마치 누구에게나 그러한 기능을 제공하는 것처럼 전제한다. “힘들면 집에 가면 되지”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통용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문장 안에는 가족이 누구에게나 보편적인 안전기지일 것이라는 가정이 숨어 있다.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 집은 회복의 공간이 아니라 긴장의 공간이었다. 가족은 돌봄의 단위가 아니라 평가와 침묵, 때로는 방치의 장소였다. 이런 경우 성인이 된 뒤의 독립은 단순한 자율의 획득이 아니다. 오히려 원래도 충분히 존재하지 않았던 안전망이 공식적으로 사라지는 경험에 가깝다. 그래서 자취는 자유의 상징인 동시에 배경의 소멸로 느껴질 수 있다.


‘돌아갈 집이 없다’는 감각은 그것은 실패했을 때 나를 받아줄 관계, 아플 때 잠시 기대도 되는 장소, 아무 성과 없이도 머물 수 있는 자리의 부재와 관련된다. 이 부재는 사람을 끊임없이 성과와 통제로 이동시킨다. 안전이 관계 안에서 보장되지 않을 때, 사람은 그것을 능력이나 돈, 완벽함 같은 다른 자원으로 대체하려 한다. 그래서 인정 욕구가 커지고, 무시나 냉담에 대한 민감도도 높아진다.


가족은 강한 정서적 단위로 이상화되지만 그 내부의 폭력과 냉담, 정서적 실패는 사적인 것으로 은폐되곤 한다. 사람들은 ‘가족이니까’라는 이유로 일정 수준의 상처를 정상화한다. 그러나 어떤 상처는 삶 전체를 해석하는 방식이 되기도 한다.


부모는 가장 먼저 사랑과 인정을 기대했던 대상이기에 머리로는 이미 포기했는데도 마음은 끝내 포기하지 못한다. 미움과 기대, 체념과 갈망, 거리두기와 확인 욕구가 동시에 남는다. 가장 먼저 사랑받고 싶었던 대상이라는 사실이 이 관계를 끝내 단순하게 만들지 못한다.


그렇다면 돌아갈 집이 없다는 감각은 어떻게 다뤄져야 할까. 나만의 안전기지를 다시 만들어가면 된다. 늦게라도 안전의 감각을 새롭게 익혀가는 일이다. 집이라는 공간을 회복의 장소로 바꾸는 것, 나를 함부로 대하지 않는 관계를 선별하는 것, 성과가 없을 때조차 자기 존재를 곧바로 깎아내리지 않는 내면의 태도를 기르는 것. 스스로의 삶 안에 안전 기지를 다시 세워가는 과정일 것이다.


결국 할 수 있는 일은 적어도 그 감각의 정체를 오해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사실을 아는 데서부터비로소 자신의 거처를 만들어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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