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집으로 이사를 온 지 아직 한 달이 안됐다. 커다란 책장 두 개를 새로 샀고, 파란색 소파를 팔았다.
이 동네에는 어르신들이 많이 사신다. 오래된 집들 사이사이에 전동 휠체어가 많이 섰고, 할머니들이 가꾸시는 낡은 화단에는 진분홍색과 샛노란색 꽃들이 그득하다. 볕 좋은 가을날이 되면 저 화단 위에 빨간 고추가 널려 동네는 온통 빨간색이 될 거야. 나는 그 색도 얼른 보고 싶어 졌다. 밖에 나갈 때면 현관 계단에 앉아 계신 할아버지께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드린다. 그러면 할아버지 얼굴은 화단이 된다. 시간이 새겨 놓은 깊은 주름이 우아한 곡선을 이룬다.
"우리 떡이라도 사다 돌려야 하는 거 아닐까?"
미루다 미루다 결국 이사한 지 몇 주가 지나서야 부랴부랴 떡을 샀다. 시루떡을 사야 하는데, 개피떡과 백설기와 찰떡밖에 없었다. 우리 떡 종합 선물세트를 만들어 드리자. 수줍은 마음으로 떡을 돌렸고, 이웃들의 표정이 선했다. 평생 못 해볼 일을 남편 덕에 했다.
아무튼, 이렇게 군인 관사를 나왔으니 곧 남편 전역도 가까워진 셈이다. 백수 부부가 되어 오랫동안 꿈꿔오기만 했던 것들을 하나하나 해봐야겠다. 자주 여행을 가야지. 많은 괜찮은 글을 쓰고, 멋진 그림도 많이 그려야지. 아쉽던 공부를 더 하고, 새로운 바람에 몸을 맡겨도 봐야지.
그러던 중에 작은 출판사의 월간지 표지 그림을 그리게 됐다. 진짜 적은 돈이지만 그림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좋아서, 늦은 밤 서강 대교를 걷다가 남편과 함께 소리를 질렀다.
"나 그림으로 돈 번다?!"
"내가 뭐랬어, 될 거랬잖아!"
"아아아! 나 그림으로 돈 번다!"
"정말 예뻐, 모든 게 다 예뻐."
그 일은 마치 한동안 우리가 보낼 '자유시간'을 축하하고 응원해주는 축포처럼 여겨졌다. 우릴 닮아 소박한 작은 집에 사는 일도, 계속 그림을 그리게 된 일도, 고단한 직장생활을 잠시나마 쉬게 된 일도. 그 모든 일의 좋은 시작처럼. 우리는 반짝이는 다리 위에 서서 서로를 꼭 안았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너네 괜찮은 거 맞아?, 애걔걔 그 돈 가지고 살 수 있겠어?, 앞날 걱정이 안 돼?, 라고 말할 일들밖에 없는 것 같지만, 그렇기에 우리는 더욱 꼭 안았다.
"우리 아직 젊잖아."
맞아, 우리는 아직 젊어. 일이 년 늦는다고 엄청나게 뒤쳐질 리 없어. 아니, 뒤쳐지면 또 어때.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살자. 천천히, 천천히 가자.
라고 말해도, 코로나 때문에 이미 여행은 미뤄졌고, 햄버거를 덜 사 먹어야 한다는 압박이 들기도 하고, 우리가 정말 잘 해낼까?, 하는 생각도 종종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모든 일이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다는 걸 벌써부터 배우고 있다. 그래도, 지금이 아니면 후회할 것 같은 걸 어떡하나.
그리고, 정말 지금이 아니면 후회할 것 같아서, 책을 쓰기로 했다. 가을이면, 우리 성정을 닮아 소박한 책이 세상에 나올 것이다. 그래, 괜찮을 거다. 그림도, 글도, 공부도, 여행도, 우리 인생도. 우리 생각과 다르더라도 괜찮고 말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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