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툴고 오래된 소리

by 권미림

저녁 시간, 아파트 복도 맨 끝에 있는 우리 집까지 쭉 걷다 보면 집집마다 식탁에 무얼 올리시는지를 알게 된다. 음, 오늘은 김치찌개 드시나 보네. 옆옆집에서 진한 찌개 냄새가 풍기면 나도 오늘 김치찌개나 끓여 먹을까, 하다가 바로 옆집에서 카레를 끓이는 냄새가 나면 또 그게 당긴다. 바람이 통하도록 현관문을 아예 활짝 열고 지내는 집도 많다. 그런 집들 앞을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러 갈 때는 나도 모르게 괜히 쪼그라든다. 절대로 집 안을 들여다보는 실례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 문 열어둔 사람은 신경도 안 쓰는데 말이다.


낯선 풍경은 저녁시간의 냄새나 열린 현관문만이 아니다. 전에 살던 집에서는 어린아이들 노는 소리가 자주 들렸다면 이사 온 이 집에서는 할아버지들 수다 소리가 자주 들리는데, 그건 또 다른 낯섦이다. 할아버지들이 저렇게 말씀이 많으셨나. 나는 슈퍼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하드를 드시며 얘기하는 할아버지들 모습을 베란다 너머로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웃다가도 다른 분들보다 폐활량이 좋으실 것 같은 목소리를 찾는다. 저분들 중에 꼭 어설픈 색소포니스트가 계실 것 같아서다.




비 오는 날, 우산을 쓰고 쓰레기 버리러 나가던 길에서 나는 우뚝 서버리고 말았다. 아파트 1층 조금 열린 베란다 창문 너머로 서툰 색소폰 소리가 들렸는데, 비 오는 날이어서 그랬는지 그 소리가 제법 그윽했다. 또, 음, 아슬아슬하기도 했다. 음표 하나하나를 더듬어 보는 것처럼 곡조가 느렸고, 음이탈이 날 것도 같았다. 게다가 오래된 서글픈 가곡을 연주하시는 걸 보니 색소폰 부는 사람은 청년이 아니라 나이 지긋한 어르신일 것 같았다.


쓰레기를 버리고 돌아오는 길에서도 그 집 앞에 걸음을 멈췄다. 비가 오는 날, 볕이 들지 않아 어두울 집 안에서 불 하나 켜지 않고도 괜찮으실까. 나는 아까보다 조금 더 오래, 조금 더 친근한 마음으로 그 앞을 서성였다. 그리고 서툰 색소포니스트의 손을 상상했다.


그 손은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일을 하던 손일 테다. 인생에다 젊음을 내어주고, 대신 나이 드는 일에 느리게 적응하는 사람의 손. 그래서 이제는 열정 넘치는 일터에서의 시간보다는 집에서의 긴 시간을 견뎌내야만 하는 사람의 손일 테다. 불현듯 주어진 늙음, 아니 순식간에 빼앗겨버린 젊음. 그것을 애통해하던 날들 중에 색소폰을 들었을 손일 테다.


이, 왜 이렇게 부정적인 거야. 나는 다시 이런 상상을 했다.


아쉬울 것 없이 불사른 젊음. 고된 노동이 허락한 노년의 안락. 그 나른한 안락 속에서 다시 깨닫기 시작한 배움의 기쁨. 색소폰, 나의 색소폰! 청년 때의 빠릿한 정신은 이미 흐려졌고 투박해진 손가락의 움직임이 더디나, 내 안에 여전히 건실한 열정을 발견하게 해준 나의 색소폰을 놓을 수가 없다. 눈에 내려앉은 노안 따위 아무 문제가 되지 않지. 오래된 폐이지만 호흡을 깊이 내뱉기에는 여전히 쓸 만하다. 그래, 나는 여전히 살았다. 나의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다.




아파트 입구로 들어와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 색소폰 소리가 들렸던 집이 어딜까 가늠해본다. 저어기, 저 집이겠다. 그 집 현관문 옆에는 빨간 고무 대야가, 그 안에 심긴 반듯한 고추 모종 몇 개가 문패처럼 서있었다.





ⓒCraig Whitehead, unsplash











매거진의 이전글오래된 집으로 이사를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