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버린 밤엔 비가 내렸다. 기상청에서 예보했던 시간보다 멀찍이 물러선 시간에. 그래도 밤 깊은 시간에 자그맣게 떨어지는 빗소리는 청량감을 주기에 꽤나 만족스러웠다. 여름 장마철 일기예보라는 건 생각만큼 맞아 들어가질 않아서 낮 시간대에 예고된 비를 대비하기 위해 우산을 늘 챙기게 된다. 도시에서의 여름이란 매미 우는 소리를 듣기가 어려운 거라 여름을 온전히 느끼려고 일부러 도시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한적한 시골로 향하곤 한다. 여행스케치의 '별이 진다네' 도입부에 들리는 풀벌레 우는 소리만으로는 충분치 않기 때문이다.
겨울엔 고양이 우는 소리가 밤을 채우고 여름엔 매미 우는 소리가 낮을 채운다. 간혹 밤을 잊은 녀석들은 낮이고 밤이고 구분 없이 울곤 하지만 말이다. 사계절이 뚜렷했던 지난날은 희미해지고 이젠 여름과 겨울 그 사이의 약간 선선함이 감도는 날씨만이 존재한다. 탐구생활이라는 걸 하던 어린 시절엔 봄방학, 여름방학, 겨울방학을 꽤나 감질나게 기다렸다. 컴퍼스에 사인펜을 꽂아 빙그르르 한 바퀴 돌려 원을 그린 다음 플라스틱 자를 대고 하루 일과를 계획하던 시절이었다. 일기는 하루 미루면 내일 쓰면 되겠지 하고서 차곡차곡 미루고선 방학 막바지가 되어서야 부랴 부랴 채우곤 했었다. 교육방송을 기다리는 동안 엎드려서 빈 종이에 낙서를 하거나 탐구생활 내용 중 아는 부분이 있으면 내용을 미리 적어두곤 했었다.
머리가 굵어지고 키가 크면서 성년이 되었고 사회생활이라는 걸 꽤 오래 지속하고 있다. 문득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면 내가 벌써 이렇게 나이를 먹었나 싶을 정도로. 지난날의 삶의 패턴과 맞물려 지금의 삶과 훗날의 삶에 대한 계획들을 세우곤 한다. 수입, 지출, 벌이에 대한 생각들. 일기를 몰아서 와르르르 쓰지 않고 방학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은 삶에 계획은 점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만약을 대비한 방어책도 있어야 하고 삶을 유지하기 위한 안전장치도 있어야 하고.
방학이 시작되기 전에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받았던 두껍게 인쇄된 탐구생활. 그땐 교육방송을 보면서 하나씩 해나가기도 했고, 다른 친구들이나 가족에게 물어보면서 탐구생활 속 빈칸을 잘 채울 수 있었다. 어른이 된 지금 삶이라는 탐구생활에 있는 빈칸을 난 잘 채워나가고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