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스러운 사람
마치 귀 바로 옆에 흡음재라도 가져다 놓은 듯 온통 먹먹한 기분이 드는 커다란 방 속에 갇혀 세상을 누비는 것 같았다.
내 방 안에 누군가를 들여놓으면 절대 안 된다고 법으로 정해 놓은 것처럼 그 공간에는 나 말고 다른 누구도 들어올 수 없었다.
들어오려 해도 누가 만들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자연적인 힘을 가진 물컹거리는 보호막에 가로막혀 들어오지 못했다.
때때로 누군가를 초대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도, 나의 몸과 머리는 방의 크기를 반사적으로 떠올리게 해서 무의식 속에서도 방 속에 들어가 있게 했다.
문은 두 개가 있었으나 마치 오랫동안 열린 적 없다는 것을 알려주듯 억지로 끼워 맞춰져 있는 모양새였다.
끼-익 끼-익 쳐다보기만 해도 "제발.. 열지 말아 줘요"라고 외치는 문 같았다.
외로웠다. 많이 외로운 모양이었다.
알지 못하는 이유로, 알 수 없는 존재가 나를 방 안에 가둬두고
마치 '이게 세상의 전부야'라고 알려주고 있는 듯, 아니 학습시키고 있는 듯했다.
나 말고 모두가 그런 방 속에 갇혀있는 줄로만 알았다. 각자의 방 속에서.
하지만, 세상에서 나에게 보여주는 '모순'들은 계속 나를 푹-푹 찌르고 있었다.
“저 사람은 어떻게 사람들과 마음을 터놓고 친하게 지낼까?
어떻게 허물없이 편한 관계를 오랜 시간 유지할 수 있을까?
서로가 편한 관계는 어떻게 만든 걸까?
…"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은 위와 같은 질문을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다.
방의 중앙에 마치 발을 심어놓은 듯 방의 중앙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없었다.
밖에서 방을 쳐다볼 수 있는 지금, 그때의 기억들은 나에게 아까운 시간들 그리고 후회의 의미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아쉽다. 아깝다. 왜 그렇게 방 속에서 지냈을까. 왜 나만 그랬을까.
다시 끔찍한 그때의 기억을 떠올려본다.
세상 그 누구도 내 방 안에 들어올 수 없었다.
부모님, 가족 그 누구도 들어올 수 없었다.
내가 가족을 '불편함의 대상'으로 느꼈던 이유다.
TV 프로그램 또는 영화의 장면들에는 부모님과 자식들의 사랑과 가족애가 마치 꿀처럼 흐르고 또 흐른다.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해 보려 여러 번 시도도 해보았다. 하지만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방 중앙에 기둥처럼 박힌 두 발을 빼내기 위해 한 발씩 무릎에 힘을 주고 발로 땅을 아무리 밀어봐도 발버둥 치는 모습밖엔 연출되지 않았다.
내 인생 영화는 그랬다. 발버둥 치다가 지쳐 다시 똑바로 서 방 중앙에 박혀 살았던 씬들의 연속이다.
지루하고 괴롭고 힘들고 아프고 또 괜찮아지다가 또 발버둥 치다가 그렇게 내 영화는 지루하고도 어쩌면 끔찍한 장면들로 마치 트루먼쇼처럼 방영되었다.
누군가 대단한 인물이 나타나 나에게 손을 내밀어 주기를.
소외받고 방치당하고 있는 나를 구출해 주기를.
모순적인 상황들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게 해 주기를 바랐다.
아름다운 탈출을 꿈꾸었지만, 방 안에는 적막만이 흐르고 있었다.
사실 그때 당시에는 내가 방 속에 갇혀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아니 나는 나라는 사람을 알지 못했다.
관계 속에서 나를 발견한다고 하지 않는가
나는 남을 바라보며 내 모습을 상상했고, 남들의 시선과 기준 속에서 나의 기준과 시야를 확장해 나갔다.
스타벅스는 나에게 마치 방안에 누군가가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곳이었나 보다.
쉬는 날이면 스타벅스에 가, 혼자 노트북 또는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게 나에겐 위로였나 보다.
알지 못하는 사람들, 처음 바라보는 공간들이 나에겐 방 밖에서 누군가와 소통을 나누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했다.
당연하게도 철저히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지만.
커피를 마시고, 같이 온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그들을 보며 어쩌면 나는 '나 찾기'를 갈구하고 있었나 보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나를 발견하지 못했다.
무언가를 깨닫고 느끼고 싶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행위들은 쓸모없는 행위들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마냥 후회할 수만은 없는 게, 그 순간 나는 일시적이라도 위로를 받았으니 커피값은 했다고 생각이 든다.
그래도 이제 스스로 '나를 모른다는 사실'은 인지했으니 다행일까.
스타벅스는 더 이상 다른 사람들의 관계 속에 억지로 얽매여 방 외부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하는 공간이 아니게 되었다.
나는 양재를 좋아한다. 아니 좋아했고, 지금 그 감정은 전보다 덜해졌다.
양재는 차들로 가득한 번잡한 도로뿐만 아니라, 말죽거리와 같은 꽤나 조용한 골목길들이 공존하고 있다.
한 때 나는 양재에 잠시 살았었다.
바쁘게 사는 와중, 방의 중앙에 박혀 있다는 것을 감각적으로 느낄 때면 밖으로 나가 걸었다.
조용한 골목은 나에게 휴식을 주었고, 번잡한 거리는 마치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있는 것 같다는 착각을 들게 했고, 나도 그 사람들과 같은 사람이다라는 것을 느끼게 했다. 그것은 실제로 즐거웠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나갈 수 없는 방에서 느낄 수 있는 최대의 즐거움이었다.
나는 동물을 좋아한다. 특히 강아지를 좋아한다.
순수한 눈으로 마치 “내 세상엔 너만 있어”라고 말해주는 듯하다.
강아지를 좋아하는 이유는 어쩌면 그 귀여운 모습보다 나와 비슷한 세상을 살고 있다는 느낌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완전히 다르다.
나는 벗어나고 싶어 발버둥을 치는 모습이라면, 강아지들은 그게 '자기들이 원하는 세상'인 것이다.
그들의 세상은 아름답다. 순수하고 사랑스럽다. 하지만 그런 모습을 닮고 싶어 하는 사람은 세상에 없을 것이다.
내가 방 속에서 31년 가까이 머물고, 발버둥 치는 모습을 내가 아닌 외부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된 계기는 특별하지 않았다.
우연히, 귀인은 찾아온다.
마치 누가 나를 지켜보다가 더 이상은 안 되겠다 판단이 들어 보내주는 것일까.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 타이밍에 생각지도 못했던 방법으로 내 세상에 잠깐 나타났다가 구름처럼 사라진다.
하지만 그 구름은 마치 유적지의 낙서처럼 그 또한 보호받고 영원히 지워지지 않은 채 남아있게 된다.
그들은 모르겠지만, 나의 세상에 낙서들은 항상 감사라는 액자에 걸려 있다.
이번에 나를 찾아온 귀인은 나에게 지금까지 느낀 그 어떤 깨달음 보다 울림이 큰, 아니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꿔준 귀인이다.
이 알 수 없는 사건은 기다란 실의 중간중간 나의 인생 장면들이 불연속적으로 걸려 있는 듯 운명처럼 느껴지게 한다.
과연 진실로 운명은 존재하는 것일까?
나는 배려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착하지 않아도 되며, 다른 사람들의 안위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또한 내 행동의 결과를 남이라는 기준에 두지 않아도 되고,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나를 가장 소중하게 여겨도 되며, 내 감정에 솔직하게 말하고 행동해도 된다.
모순되고 불편한 상황을 불편하고 힘들게 여겨도 되고, 내 감정이 다른 사람들에게 잠식되지 않아도 된다.
배려하지 않아도, 남을 기분 나쁘게 만들어도, 그리고 내가 행복해도 된다.
나는 그럴 수 있다. 그래도 된다.
남의 눈치, 시선, 평가를 두려워하며 말하지 않거나 행동하지 않았던 그 모습들은 결국 방의 벽을 더욱 두껍게 만들었다.
말을 하지 않게 만들었고, 관계를 형성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방 문을 더 열기 어렵게 만들었다. 아니 열고 싶지 않게 만들었다.
나는 몰랐다.
잘못된 배려가 있다는 사실을
사실 그것은 배려가 아니었다.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를 해야만 한다는 가르침과 훈육이 나의 정신과 마음을 빼앗아갔고, 그래야만 한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 스며들어 모든 행동에 당위를 부여해 버렸다.
그렇게 계속 살아왔다.
나를 구성하는 게 무엇들인지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돌아볼 시도까지는 내 생각이 닿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나는 나를 몰랐다.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길이 없었다.
그렇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반응과 시선, 기준으로 만들어진 드라마였다.
나에게 남은 건 없어 보였다.
허울뿐인 겉모습, 속 빈 팥도너츠 같았다.
지금은 그래도 그 방안에 있지 않다. 밖으로 걸어 나와 내 감정을 살피는 중이다.
가끔은 자연스레 의식치 못하고 방 안에 발을 들여놓을 때가 있다.
아마도 방 문을 안 닫아놓은 것 같다. 아니, 방 문이 안 닫히는 것일 수도 있겠다.
너무도 오랜 시간 권다이의 모습으로 살아왔기에, 내 주변에서 계속 서성이며 떠나지 못하는 것 같다.
가끔 과거를 회상하다 보면, 그 방은 나의 후회스러운 삶의 잔상으로 느껴지게 한다.
그리고 이제는 다시 앞을 바로 볼 수 있게 큰 동기를 주는 존재가 되어가는 것 같다.
앞으로 그 방을 돌아보지 않아도 되는 삶을 살고 싶다. 살 것이다.
너무나도 당연히 여겼던 '배려'가 인생을 휘어잡고 있었다는 사실은 아직도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충격적이다.
내 안에 아직 충격의 진원지들이 많이 남아 있을 것 같다.
당연히 여기던 무언가가 "너 아직 방에 머물고 있어!"라고 큰소리 쳐주길, '사실'을 깨닫게 해 주길 원한다.
나는 자연스러운 사람이 되고 싶다.
내가 진정 원하지 않는 것들은 내려놓고 거부하고, 자연스레 살갗으로 느껴지는 감정들로 순간순간을 즐겁게 살아가고 싶다.
좋은 사람이 무엇인지에 대해 귀인에게 질문했다.
귀인은 "자연스러운 사람"이라고 말했다.
관계 속에서 자신의 감정을 느끼는 그대로 좋으면 좋게, 싫으면 싫게 받아들이고 표현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존재.
우선 나도 그 존재를 목표로 삼고 살아갈 것이다.
내 감정을 먼저 알아차리고, 그 감정들로 나라는 사람을 스케치하고 나중에는 채색까지 할 수 있는.
완성되지 않는 그림이겠지만, 형태와 색이 있는 '진짜 나'로 살아가고 싶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과 관점을 바꿀 수 있게 되어 정말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