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저는 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로서 초등학교 3, 4학년 아이들과 예배를 같이 드리고 있습니다. 지난 2년 반 동안 맡은 바를 따라 제가 아이들에게 가르친 것도 더러 있겠습니다만 저 역시 아이들 덕분에 배우고 느낀 게 많이 있습니다. 낯을 많이 가려 인사도 말 없이 하던 아이가 언젠가부터 공과 시간에 제가 던지는 질문에 대답하는 걸 마주할 때의 감동이라던지, 별 기대없이 맡긴 대표 기도의 자리에서 아이가 예수님께 "혹시 이 자리에 외로워 하고 있는 친구가 있다면 찾아가 주셔서 함께 해달라"고 구할 때 받은 충격이라던지, 반 아이가 여름 성경 학교 때 수영장 가는 언덕길을 오르다 넘어져 무릎이 까진 걸 보고 차라리 내가 다친 거였으면 하고 바랐던 마음이라던지 말입니다. 이렇게 즉각적인 느낌이나 배움이 있는가 하면, 아이들의 어떤 말과 행동은 저를 긴 씨름으로 끌어가기도 합니다. 그리고 오늘은 지난 몇 개월 동안 씨름했던 문제에 대해 쓰고자 합니다.
한 가지 미리 말씀드려야 할 것은, 중요하게도, 보통은 어떤 문제나 의문을 이겨냈다는 확신이 든 후에 글로써 정리하는 데 반해 지금은 제게 그런 확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데도 이 글을 쓰기 시작할 수 있는 건 현재 제가 느끼고 있는 '얼추 이겨낸 것 같다'는 막연한 느낌이 이번에는 거꾸로 글을 씀으로써 '이겨냈다'는 확신으로 귀결될 거라는 믿음, 즉 '이겨낼 거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일이 있던 건 올해 4월, 고난 주간의 주일이었습니다. 예배 시간, 전도사님이 아이들에게 "예수님께서 왜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셨을까요?"라고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뒤에서 몇몇 장난기 많은 아이들이 "무서워서요!" "죽는 게 무서워서요!" 라고 답하고 깔깔 웃는 소리를 들었을 때, 제 마음 속에는 '아니야!' 하는 강렬한 외침이 있었습니다. 너무도 즉각적인 반응이어서 '혹시 방금 내가 입으로 외치진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입니다. 저는 곧 그 아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으셨다고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제 말이 아이들에게 맹목적인 믿음을 요구하는 다그침 같은 건 아니어야 할 것이며, 또 '예수님께서 죽음을 두려워하셨는가?'라는 질문이 단순히 아이들의 천진난만함에서만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복음서 본문을 정직하게 마주하는 누구라도 던질 법한 질문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제게 스쳤습니다. 이에 저는 제 안의 확신을 점검하기 위해 오히려 스스로 질문들을 던지기 시작했고, 그렇게 또 하나의 긴 씨름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