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두려움의 문제
앞서는, 겟세마네에서 예수님께서 간구하시며 말씀하신 ‘잔’의 의미와 용례를 살펴봄으로써 ‘예수님께서 죽음을 두려워 하셨는가?’ 라는 질문이 질문으로서 유효하다는 나름의 결론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다양한 접근 방식을 취할 수 있을 텐데요, 저는 질문의 층위를 다음과 같이 나눠 답변해보고자 합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죽음’을 두려워 하셨는가? 둘째, 예수님께서 - 그게 무엇이든 – ‘두려워’ 하실 수는 있는가?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반복해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고 하셨으며, 풍랑이 이는 배 안에서 제자들이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막4:38)라고 외칠 때 바람을 꾸짖으시며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또 “어찌 믿음이 없느냐”(막4:40)고 책망하셨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내내 자신의 죽음을 숨기지 않고 언급하셨습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막8:31) 분명히 말씀하신 것과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요10:17)이라고 선언하신 것을 볼 때 죽음은 예수님께 낯선 대상도, 두려운 대상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다만 ‘죽을 것을 아셨으니 두려워하지 않으셨다’는 말로는 설득력이 부족할 것입니다. 보통 인간에게는 ‘죽음을 아는 것’ - 특히 닥친 죽음일 때 – 이 오히려 더 큰 두려움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앎을 근거로 예수님께서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으셨다고 답하고자 한다면, ‘죽을 것’을 아셨기 때문이 아니라 ‘죽음을 이기심’(히2:14)까지 아셨다거나 확신하셨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행적과 능력에 근거를 두고 예수님께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셨을 것이라고 답한 데에 방법론적으로 치명적인 결함이 있지는 않을 거라고 자신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해결해야 할 의문은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육신을 입으셨기에 우리처럼 슬퍼하고 고민하고 고통스러워하실 수 있으셨다면, 두려움이라고 예외일 것은 무엇인가하는 의문 말입니다. 저는 우선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심을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구약의 곳곳에서 “두려워 말라” 말씀하셨음을 떠올렸습니다.(사41:10;13, 신31:8, 시27:1, 출14:13, 수1:9, 시23:4, 시34:4) 믿는 자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언제 어디서든 자신을 의지하게 하시는 분께 무엇이라도 두려워하실 가능성이 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건 예수님께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곧이어 ‘두려움’과 ‘완전함‘의 관계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았습니다. ’두려움의 가능성 없음‘을 ’완전함‘의 조건으로 여길 수도 있겠지만, ’두려움의 가능성이 열려 있음‘에도 ’전혀 두려워함이 없을 때‘에야 ’완전‘하다고 말할 여지가 있고, 또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것만을 두려워할 때‘야말로 ’완전‘한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가장 먼저 생각한 첫 번째 전제 - 완전함이란 곧 두려움의 가능성 자체가 차단된 상태라는 가정 - 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움을 느끼실 수 없는 분이라 할 것입니다. 이 전제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전능하심을 철저히 보존하고 강조하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는다는(요일4:18) 말씀은 하나님의 본질 안에 두려움이 있을 수 없음을 증언하며 이 입장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한편, 두 번째 전제 - 완전함이란 두려움의 가능성이 열려 있음에도 실제로는 두려워하지 않는 상태라는 가정 - 는 예수님께서 사람의 육신을 입으셨고 인간적 정서를 경험하셨음을 놓치지 않고 있습니다. 두 전제는 얼핏 보기엔 양립할 수 없는 것 같지만, 한 인격 안에 신성과 인성이 연합하신 예수님의 신비 안에서는 같이 설 수 있는 것으로서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신성에 의해 닫혀 있던 두려움의 가능성이 인성에 의해 열렸으며, 인성에 의해서는 피할 수 없었을 두려움의 순간이 거룩한 신성에 의해 온전한 사랑과 순종의 순간으로 전복되었다.
두 가지 전제의 양립 가능성을 생각하는 데에도 시간이 걸렸지만, 저를 정말 고뇌하게 한 건 세 번째 전제 - 완전함이란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것만을 두려워하는 상태라는 가정 - 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 전제는 예수님께서 생물학적 죽음은 두려워하지 않으셨을지라도 하나님께 버려지고 단절되는 사건만큼은 마땅히 두려워해야 하지 않는가하는 의문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이 의문은 제 인간적 직관에는 굉장히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버려진다는 것은, 그것도 성자이신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진다는 것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비극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여기서 떠오르는 의문은 이렇습니다. 만일 ‘잔’이 정말로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라면, 왜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에서야 그토록 깊은 고뇌를 드러내셨는가? 두려움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내면에 태초부터 잠재해 있다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증폭된 것일까? 그러나 그렇게 말한다면, 하나님의 본질 안에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모순적인 결론에 이르게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게 아니라면 겟세마네가 두려움이 발생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인가? 그렇다면 어떻게?
먼저 분명히 할 것은, 첫 번째 전제의 내용과 같이 두려움은 하나님 안에 본래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원한 교제 안에는 오직 사랑과 영광만이 충만했으며(요일 4:8), “온전한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다”(요일 4:18)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그러므로 태초 이전에 두려움이 잠재해 있었다는 말은 성립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적 정서와 연약함의 가능성이 열린 것(히 2:17; 4:15)은 성자이신 예수님께서 인성을 입으셨을 때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위의 두 번째 전제의 내용과 같이 가능성이 곧 실제 발현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공생애 동안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죽음을 담대히 말씀하셨습니다(막 8:31; 요 12:23).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경험하신 고뇌는, 이전부터 차곡차곡 쌓여온 두려움이 폭발한 것이 아니라, 그 순간에 비로소 잔이 실제로 임했기 때문에 드러난 것이라 보아야 합니다. 복음서의 기록은 예수님께서 “그 잔”이 아니라 “이 잔”(τοῦτο τὸ ποτήριον, 마 26:39)을 언급하셨음을 전합니다. 아직 오지 않은 막연한 사건이 아니라, 이미 손에 쥐어진 현실적 무게가 임한 것입니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성경 기자들의 언어 선택입니다. 마태와 마가는 예수님의 상태를 “심히 고민하다, 슬퍼하다”(περίλυπος, 마 26:38; 막 14:34)라고 표현했고, 누가는 “고뇌”(ἀγωνία, 눅 22:44)라고 기록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큰 소리와 눈물”(히 5:7)을 언급합니다. 그러나 누구도 φόβος(phobo, 두려움)이나 δειλία(delia, 겁냄·비겁함)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고뇌가 단순한 공포심이나 비겁함이 아니었음을 보여줍니다. 기자들이 택한 단어는 예수님의 내적 경험을 존재적 애통과 깊은 비애로 드러냅니다. 이 지점에 대해 성경의 기자들이 예수님의 상태를 실제로 알지 못하면서 의도적으로 단어를 선택한 것은 아니냐는 의문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여기에 대해서는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는 말씀(딤후3:16)이 증언하고 있음을 언급해두도록 하겠습니다.
종합적으로 전제 자체의 설명력, 가능한 전제들 간의 연립 가능성 등을 고려할 때 - 전제에 예수님을 끼워맞출 것이 아니라면 - 이번에는 전제를 다음과 같이 수정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땅히 두려워할 것을 두려워하셨다기보다는, 마땅히 애통해하실 것을 애통해하셨다. 겟세마네의 고뇌는 태초부터 잠재해 있던 두려움의 점진적 발현이 아니라, 그 순간에 실제로 임한 잔의 무게가 불러일으킨 사랑의 애통이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 장면은 두려움의 순간이 아니라, 사랑의 깊이가 드러난 애통의 자리였다고 할 것입니다.
이로써 현재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수준에서 두려움의 문제를 다루어 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직 다루어야 할 질문 또는 문제가 남아 있고, 다음 문제는 '주저함'에 관한 것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