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원평 『아몬드』 리뷰
유명한 책이어서 언젠가 읽어 봐야지 했다가 대출 예약 순서가 돌아와서 드디어 읽어 보았습니다.
주인공 윤재가 선천적으로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한다는 설정이 흥미로우면서도 식상한 느낌이 들기도 했는데요.
작가의 섬세한 심리 묘사, 상황 묘사 덕분에 식상한 느낌은 사라지고, 주인공이 겪는 일들과 그 주변인들의 이야기가 바로 옆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기에 시종일관 잔잔하고 담담한 윤재의 모습이 갓난 아기 같이 순수해 보이기도 하고, 온갖 풍파를 겪고 인생에 통달한 현자처럼 세상을 초월한 듯 보이기도 해서 묘한 느낌이었습니다.
윤재와 상자 속 남자가 겪은 불행한 사건들을 내 일이 아니니 상관없다고 모른 척할 수 없는 이유는 그들에게 일어난 일이 내게도 일어날 수 있고, 내게는 다행스러운 일이 누군가에게는 끔찍한 불행일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상자 속의 남자」 의 형의 반사적인 자기 희생이 그와 그의 형에게는 불행이었지만 도라의 가족에게는 천만다행의 일이었고, 그 불행에서 기인한 두려움으로 그가 외면했던 사건이 윤재에게는 가족을 눈앞에서 잃는 크나큰 불행이었죠.
하나의 사건이 각자의 입장에 따라 불행 또는 다행이 된다는 게 참 역설적이고, 위기에 처한 누군가를 아무런 계산 없이 돕는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제가 그 크리스마스 이브 날 그 자리에 있었다면 과연 윤재의 가족들이 처한 위기에 도움을 줄 수 있었을지...
아마 이 작품 속 등장인물들처럼 그 자리에 얼어붙어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죄책감을 느끼다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자기 합리화를 하며 그 날을 기억 속에서 지우고 싶어했겠지요.
그리고 내게 도움의 손길을 건넨 누군가에 대한 고마움을 쉽게 잊거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잘못은 저지르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다시 한번 하게 됩니다.
다른 이의 불행과 어려움에 '진심'으로 공감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리고 공감을 하더라도 도움의 손길을 실제 내민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보여주는 부분들입니다.
'나만 아니면 돼'라는 생각을 이기적이라고 비난할 수는 없지만 그런 생각으로 외면한 다른 이의 어려움이 어느 날엔가는 내 어려움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잊지는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너무 멀리 있는 불행은 내 불행이 아니라고, 엄마는 그렇게 말했었다.
- 출처: 『아몬드』 (손원평, 다즐링, 2023)
멀면 먼 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외면하고, 가까우면 가까운 대로 공포와 두려움이 너무 크다며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껴도 행동하지 않았고 공감한다면서 쉽게 잊었다.
- 출처: 『아몬드』 (손원평, 다즐링, 2023)
그 누구의 삶도 오로지 비극이거나 오로지 희극일 수 없다는 흔한 진리를 다시 한번 곱씹어 보게 됩니다.
보는 관점에 따라 비극이면서 희극이기도 하고, 희극이면서 비극이기도 하고, 희극과 비극이 절묘하게 섞여 있어서 딱 어느 하나라고 집어 말할 수 없는 것이 삶인 것 같습니다.
사실 어떤 이야기가 비극인지 희극인지는 당신도 나도 누구도, 영원히 말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딱 나누는 것 따윈 애초에 불가능한 건지도 모른다. 삶은 여러 맛을 지닌 채 그저 흘러간다.
- 출처: 『아몬드』 (손원평, 다즐링, 2023, 에필로그)
누군가의 불행이 내게는 다행일 수도, 누군가의 아픔이 내게는 기쁨일 수도, 누군가의 행운이 내게는 운수 없는 일일 수도 있다는 점이 참 역설적입니다.
다행과 불행, 기쁨과 아픔, 행운과 운수 없는 일이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한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네요.
누구나 항상 운수 좋을 수는 없고, 누구나 항상 운수 나쁠 수는 없다는 점에서 행운과 불행은 사람들 사이에서 돌고 도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불행이 닥쳤을 때 "왜 내게만 이런 일이"라며 억울해하기보다는 "내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이번에 일어났을 뿐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덜 힘들 것 같아요.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게 쉽고 가능하다면 보통 사람이 아니라 현자겠지요. ^^
- 있잖아. 이미 일어나버린 일에 만약이란 건 없어. 그건 책임지지 못할 꿈을 꾸는 거나 마찬가지인 거야. 하지만 한 가지는 말할 수 있지. 어떻게 하든 누군가는 아프게 된다고.
형이 나를 바라봤다.
- 반대로 말하면 누군가는 기뻐지는 거야.
- 출처: 『아몬드』 (손원평, 다즐링, 2023, 특별부록-외전 단편 「상자 속의 남자」)
형의 말대로 삶은 누군가를 아프게 하고 누군가를 기쁘게 한다. [...] 아픔도 기쁨도 한 종류만은 아닐지 모른다는 것이다.
- 출처: 『아몬드』 (손원평, 다즐링, 2023, 특별부록-외전 단편 「상자 속의 남자」)
감사한 마음, 미안한 마음, 다른 이의 처지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마음.
이런 좋은 마음은 오래 남고, 그 반대의 마음들은 빨리 잊혀지면 좋겠는데 그 반대인 점이 정말 아쉽습니다.
저 역시 그러하다는 점을 반성하게 되고요.
사람들은 감사의 마음을 쉽게, 너무나 빨리 잊어버린다. 고맙다고 인사를 건네고, 다행이라고 한숨을 내쉬고, 그러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신들의 일상으로 돌아가 버린다.
- 출처: 『아몬드』 (손원평, 다즐링, 2023, 특별부록-외전 단편 「상자 속의 남자」)
안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모르게 됐거든요. 사실은 처음부터 몰랐던 거겠죠.
- 출처: 『아몬드』 (손원평, 다즐링, 2023, 특별부록-외전 단편 「상자 속의 남자」)
미안했지만 동시에 빨리 잊어버리고 싶었다.
- 출처: 『아몬드』 (손원평, 다즐링, 2023, 특별부록-외전 단편 「상자 속의 남자」)
'평범한', '평탄한' 삶을 누린다는 게 정말정말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부모의 무조건적인 지지와 사랑은 아이의 삶을 조금이나마 더 평범하고 평탄하게 만드는 아주 중요한 요소인 것 같습니다.
제 아이에게 그렇게 하고자 끊임없이 다짐하고 노력하지만 그렇지 못했던 순간이 많습니다.
다시 마음을 다잡고 지금부터라도 아이에게 사랑을 듬뿍 주고, 언제나 옆에서 든든하게 지지해 주도록 노력해 보려고 합니다.
평탄한 성장기 속에서 받는 응원과 사랑, 무조건적인 지지가 몹시 드물고 귀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부터다. 그것이 한 인간에게 얼마나 큰 무기가 되는지, 세상을 겁 없이 다양하게 바라볼 수 있는 힘을 주는지, 부모가 되고서야 깨닫는다.
- 출처: 『아몬드』 (손원평, 다즐링, 2023, 작가의 말)
20년 동안 직장생활을 하면서 하루 하루 느끼는 감정이어서 너무 공감되는 문장입니다.
참아내는 자가 살아남는 게 직장인 것 같아요.
기본적인 예의와 사회성을 갖추고 때로는 억울함을 견디며 손해 보는 느낌을 묵묵히 참아 넘기는 것. 그것이 나 같은 노동자들이 살아남기 위해 벌이고 있는 소리 없는 투쟁이다.
- 출처: 『아몬드』 (손원평, 다즐링, 2023, 특별부록-외전 단편 「상자 속의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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