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들어오려고 그래? 남들은 못 빠져 나가 야단인데, 그냥 거기 눌러 앉아.”
한국의 지인과 통화하면 종종 듣던 말. 들을 때마다 혼란스럽고 마음이 무거웠다. 대학교 식당에서도 이런 류의 대화는 잦다. 특히 나처럼 애가 있고, 곧 돌아가야 하는 학생 부부에게 한국 교육의 현실은 희망 보다는 유감 그 자체. “교육현실 때문에 아이를 낳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아예 교육에 희망을 접고 이민 가는 사람도 많다”는 얘기를 들으면 먹던 밥도 얹히는 기분이었다.
4학년에 조 단위가 필요할까?
그래서일까? 논문을 제출하고 한국에 돌아갈 생각을 하니 정신이 바짝 들었다. 마음이 무겁고 분주해졌다. 가장 큰 걱정은 아이들의 적응문제. 경쟁적 교육 시스템을 놓고 걱정할 일이 아니었다. 당장 급한 건 한국어였다. 큰 아이는 한국에서 기억, 니은 정도를 익혀온 수준이라 읽기는 되지만, 뜻은 이해하지 못했다. 더구나 돌아가면 5학년인데 그동안 놓친 어휘력을 어떻게 만회해 주어야 할지 대략난감이었다.
일단 급한 대로 아는 상사직원에게 한국 교과서 몇 권을 얻어 큰아이와 함께 들쳐보기 시작했다. 국어책은 엄두도 못 내었고, 그나마 국어 문장 분량이 적은 수학책에 도전했다. 한참을 들춰보다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억’소리가 나고 말았다.
‘벌써 억 단위가?’
독일의 동 학년 교과서엔 천 정도가 고작이고, 많아야 만 단위다. 단순 연산에 초점을 맞춘 독일 수학 교육과정에 억 단위가 필요할리 만무했다. 한참을 설명해 주고, 다음 장을 넘기니 사태는 더 심각했다. 무려 조(兆) 단위… 아연실색한 나에게 큰아이가 묻는다.
“엄마, 5학년에 올라가면 어떤 단위를 배워요?”
구구단 없는 수학공부, 속 터지는 수학진도!
‘왜 구구단 외는 소리가 들리지 않지?’
큰 아이가 2학년이 된지 한참 지났을 무렵, 문득 생겨난 궁금증이다. 그맘때쯤 소리 내서 구구단을 외우던 옛날 생각도 나면서 말이다. 그런데 뒤늦게 알게 됐다. 이곳엔 구구단이 없고, 아예 가르쳐주지도 않는다는 걸 말이다.
‘이이는 사, 이삼은 육, 오오 이십오…’
우리 어릴 적을 떠올려보면 소위 ‘영혼 없이’ 구구단을 외우지 않았던가. 바로 그런 걸 방지하기 위해서다. 구구단을 통해 곱하기의 원리를 기계적으로 외우게 하지 않고, 늦지만 아주 천천히 원리를 깨우치게 할 뿐이었다.
큰아이는 1학년 내내 숫자 1에서 30사이에서만 더하고 빼기를 반복했다. 그것도 공책에 일일이 바둑알을 그려가면서 방법을 익혀갔다.(이때 손가락은 쓰지 못하게 한다.)
2학년 때 배우는 곱하기와 나눗셈에서도 바둑알은 어김없이 등장한다. 바둑알을 하나하나 그리고 묶고, 그 묶음 안에 몇 개의 바둑알이 들었는지, 바둑알이 몇 묶음으로 묶이는지를 계속해서 배워갔다. 성질 급한 나로서는 참으로 속 터질 일이었다. 한국엔 구구단도 부족해서 20단까지도 외운다고 하더만, 바둑알을 가지고 언제까지 저렇게 묶었다, 풀었다만 계속 하고 있을지 말이다.
1,2학년 때 그렇게 답답할 정도로 느리게 진행되던 학습 진도는 3학년이 되면 제법 빨라지고 어려워진다. 2학년 때까지 주로 숫자 50이하에서 놀던 덧셈‧뺄셈‧곱하기‧나누기가 그 이상의 숫자 개념으로 확대된다. 학년 수준에 맞게 응용문제들도 제법 다뤄진다. 하지만 1학년 때부터 해오던 반복 학습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계속 이어진다.
큰아이 담임교사의 말에 의하면 중학교, 특히 인문계 중학교에 올라가면 이런 반복연습은 더 이상 없다며 다음과 같은 설명을 덧붙였다.
“공부하는 습관과 방법은 이미 초등학교에서 충분히 익혔잖아요. 게다가 개인의 능력에 맞게 학교가 정해졌기 때문에 더 이상의 반복학습은 지루함만 더할 뿐이예요. 초등학교 졸업 후의 학습은 이젠 개인의 몫이죠.”
독일의 수학은 숫자놀음이 아니다.
독일 초등학교의 수학시험은 한 학기에 두 번 치러진다. 시험채점이 끝나면 채점한 시험지를 돌려주어 부모가 확인하게 한다. 채점된 시험지를 확인하면서 초등학교 수학문제 형태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한 시간짜리 수학시험에서 학생들이 풀어야 할 문항 수는 35개에서 많으면 45개 정도이며 문제 유형은 객관식이 전혀 없는 단답형(60%)과 서술형(40%)으로 되어 있다.
점수는 문항마다 좀 차이가 있어 전체 60%를 차지하는 연산문제는 1점씩, 나머지 응용문제는 3점 내지는 4점씩이다. 여기서 특이한 점은 보너스 문제이다. 눈물이 날 정도로 어렵다고 해서 ‘크노블라우흐 아우프가베(Knoblauch Aufgabe, 마늘문제)’라 불린다. 이것은 풀어도 그만, 안 풀어도 그만인, 말 그대로 보너스이지만, 만점을 노리는 친구들은 혹시라도 잃을 점수에 대비해서 이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흥미로운 건 서술형 문제의 풀이과정이다. 문제에 해당하는 식과 풀이과정, 그리고 정답을 적는 것까지는 한국과 동일하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그 답 즉, 숫자가 갖는 의미를 적어야 한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5명이 10조각된 피자 한판을 놓고 공평하게 나눈다면 한 명당 몇 조각씩 먹을 수 있을까요?’ 라는 질문이 나오면, 우리 같으면 ‘10/’로 끝난다. 그런데 독일에선 숫자 ‘2’가 갖는 의미를 설명해 주어야 한다. 즉, “2조각은 피자 한판을 놓고 5명이 공평하게 나눌 때 한 명당 먹을 수 있는 분량입니다”라고 말이다. 이것을 놓치면 만점을 얻지 못한다.
숫자가 갖는 의미를 해석하는 것은 대학교 시험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수학과 통계시험 문제에서 결과로 나온 숫자의 의미를 반드시 적어 주어야 한다. 그렇게 수학은 계산이 목적이 아니라, 숫자가 주는 의미를 읽어내는 것임을 그들은 어릴 때부터 익혀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