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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상대주의의 한계

by 권사부

도덕적 상대주의에서는 도덕적 진실 그 자체는 사회 또는 문화를 넘어서 각기 다르다. 어떤 행위가 한 사회에서는 도덕적으로 그릇되었더라도 다른 사회에서는 도덕적으로 허용되었거나 아예 의무일수도 있다.

예를 들어보자.
홍콩에서는 15세부터 흡연을 할 수 있다(예전에, 현재는 18세). 아버지 앞에서 맞담배를 하더라도 호로새키가 아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만 19세 이상부터 법적으로 흡연을 할 수 있다. 40세가 되어도 아버지랑 맞담배를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학창시절이라 하여도 아버지가 따라주는 술은 마셔도 되는 것이 한국의 문화다.

이 서로 다른 나라의 문화에는 각 나름의 윤리관을 갖고 있는 것이다. 홍콩은 애연가의 나라이면서 세계 최고의 장수 국가 중 하나다. 그들에게 담배는 문화이며, 즐거움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담배에 대한 인식이 가면 갈수록 안 좋아진다. 흡연자들은 설 곳이 없어지고 있다. 그렇지만 음주 문화는 세계 최고(?)다. 밤새도록 술을 마실 수 있고, 술을 마실 줄 모르면 융통성이 없다면서 사회생활에 껴주지 않는 조직도 있다. 물론,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만, 아직도 애주가의 나라임에는 틀림없다.

우리가 도덕적 상대주의를 받아들이면, 아들이 중학교 2학년이 되면, 내 앞에서 담배를 꼬나물고 도넛츠를 만들어서 나한테 날려도 나는 웃으면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생각만해도 열받는데?)

보다 더 뚜렷하고 세계적인 사례를 살펴보자.

여성의 할례는 음핵이나 외음부를 절제하거나 완전히 제거하는 행위다. 의료적 효과는 전혀 없고, 오히려 고통과 후유증, 감염과 사망 위험까지 동반된다. 그런데도 일부 사회에서는 여전히 이 관습이 유지되고 있다. 왜일까? 이유는 단순하다. 그 사회에선 여성이 욕망을 절제하고, 유혹에 저항하려면 오히려 성욕 자체를 제거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여성을 '정숙하게' 만들려는 명분 아래, 그들의 몸과 삶을 통제하는 장치로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도덕적 상대주의 입장이라면, 이런 행위도 "그들의 문화니까, 그 사회에선 정당화되는 일"이라며 비판하지 못하게 된다. 그들이 그렇게 믿고, 그렇게 살아간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침묵해야 한다는 논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 그래도 되는 걸까?

중앙아프리카에서는 할례가 '틀리지 않다'고 여겨진다. 반면 한국이나 미국 등 나라에서는 같은 행위를 '비도덕적'이라고 본다. 이처럼 도덕적 상대주의 입장을 받아들이면, 서로 완전히 다른 판단이 동시에 진실이 되어버린다. 어떤 사회에선 옳고, 다른 사회에선 틀리다는 말이 모두 맞게 되는 셈이다.

노예제도도 마찬가지다. 1830년의 미국은 노예제를 도덕적으로 받아들이던 사회였다. 당시에는 많은 사람들이 노예제를 옹호했고, 그 안에서 경제가 돌아갔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그 시기의 노예제가 명백히 잘못됐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도덕적 상대주의에 따르면, 1830년 당시엔 옳았고 지금은 틀리다는 식으로 양쪽 다를 인정해야 한다. 그러면 그 시대 노예제 찬성자도 맞고, 반대자도 맞으며, 모두가 진실을 말한 것이 된다.

그런데 이건 말이 안 된다. 시대가 바뀌었다고 해서, 누군가를 억압하고 착취하고 고통에 빠뜨리는 행위가 옳았던 적은 없다. 당시의 문화가 그랬다고 해도, 우리는 지금 그걸 '잘못'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도덕은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시대를 넘어 질문하고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도덕적 상대주의는 결정적인 한계를 가진다. 비판을 멈추게 하고, 서로의 문화 속에 숨은 폭력과 억압을 묻어버리게 만든다. 우리는 타인의 문화를 무시해서도 안 되지만, 그 문화가 인간의 존엄을 해치고 있다면, 조심스럽고도 분명하게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비판은 곧 존중이다. 침묵 속의 방관이 아니라, 함께 더 나은 삶을 위한 논의가 필요하다.

메인 사진 출처: 유니세프

할례에 반대하는 아이 / 출처 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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