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불러 보았지. 대답이 없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네 이름을 가끔 불러보곤 해. 잠에서 깨어 아직 사방의 사물이 명확히 분별되지 않을 때는, 내 눈에 휘리릭 검은 물체가 지나가기도 했지. 너인가, 나는 겁도 없이 네 이름을 불렀어. 정신을 차리고 사물이 또렷이 보이기 시작한 순간에도 검은 점 몇 개가 눈동자 위로 떠다녔어.
안과에서는 ‘비문증’이라고 하더라. 눈동자 위에 잔챙이가 떠돌아다니는 거 같은 ‘날파리증’이라는 말이 더 유명한 증상. 마흔이 넘은 사람들에게 흔하게 나타나는 증상이라고, 나이가 들어서라고, 요새는 나이에 상관없이 어린애서부터 증상이 나타난다고도 했어. 의사가 큰 병도 아니고 고칠 방법도 없으니 잊어버리고 살라고 하더라. 의식하지 않으면 별거 아니라고. 검은 물체가 갑자기 더 늘어나면 병원에 와야 하지만, 그런 게 아니라면 그냥 잊고 살라고 하더라고. 뚜렷하게 검은 물체가 내 눈동자 위에서 부유하고 있는데,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살래.
너처럼. 너 같은데 역시, 너는 아니었어.
너는 잘 지내고 있니? 나는 생각처럼 안 되는 일이 많아 일상에 괴로움이 가득일 때가 많아. 한 곳에 오래 머물면서 살고 싶은데, 무슨 역마살이 꼈는지 나는 끊임없이 자리를 이동하며 살고 있다. 이쪽 동네에서 저쪽 동네는 물론이요, 이 지역에서 저 지역으로. 그리고 이제는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옮기면서 살아. 밖에 나가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하고, 걷는 것도 그다지 안 좋아하는 내가 말이야, 아주 주야장천 밖으로 돌고 있어.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니? 태어나고 자란 곳에서 줄곧 사는 사람들도 많은데, 사실 그게 마음 편하고 좋은 거잖아. 고향을 떠나서 타지로 간다고 해도 결국은 다시 고향으로, 자기가 나고 자란 곳으로 돌아와 사는 게 왜 그런 거겠어? 멀리 갈 것도 없이, 초중고 때 친구들만 봐도 대부분 우리가 같이 힘겨루기를 하며 울고 웃던 곳에서 다들 뿌리내리고 살잖아.
사는 곳만 달라지면 말도 안 해. 직업도 바뀌었어. 교사에서 소설 쓰는 사람으로, 교육자에서 예술인으로. 가난이 따라왔고 한동안 나는 잠자리에서 무척 뒤척였어. 밤이 되면 잠을 자야 하는데 생각이 많아지면서 정신은 맑아졌어. 그때 글이라도 쓰면 좋은데, 불안이 스멀스멀 해무처럼 발끝에서부터 목덜미까지 타고 올라 숨통을 조여 왔지. 무겁게 가라앉은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어. 너도 그랬을까? 아예 구름 위 하늘 너머 세상으로 가버린 너에게, 동네·지역·나라의 경계는 우스운 소리일지도 모르겠다.
모든 게 내가 원해서 그렇게 된 거라고? 그래, 맞다. 내가 끌어당겼지. 하고 싶었던 걸 다 하며 살고 있으니 행복하지 않느냐고? 행복해야 하는데, 생각보다 행복하지 않아. 욕심이 많아서 그렇다고? 그래, 그럴 거야.
18살 때 말이야, 너는 19살이었을 테고. 그때는 내가 이렇게 살 줄은 몰랐어. 알았다면 좀 더 현명하고 지혜롭게 살 수 있었을까. 그때로부터 벌써 25년이 흘렀다. 25년의 세월을 우리가 같이 건너왔다면 나는 덜 외로웠을까, 내 인생은 조금 달라졌을까. 네가 살고 있는 세상은 어떠니? 거기서는 만나고 싶은 사람을 죄다 만나며 살 수 있니? 시시콜콜한 인간관계에서 벗어나서 마음의 여유를 갖고 살 수 있니? 미움과 시기 없이 그저 물 흐르는 것처럼 여유롭고 낙낙하게 살 수 있니?
아니지?
너도 힘들지? 내가 너를 못 만나서 힘든 것처럼, 너는 나를 못 만나서 힘들 테니 너도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을 거야.
시간이 모든 상처를 아물게 한다는 말처럼 나는 이제 너를 생각해도 눈물이 안 나. 울먹울먹 마음의 응어리가 뭉쳐져서 몽글몽글 올라오기는 해도, 그게 눈물방울이 되어 흐르지는 않더라.
사실은 요새 너무 힘들었어. 너는 몽땅 보고 있을 테니 내가 힘들다는 소리를 하면 고개를 끄덕이겠지. 어떻게 하든 결국 마음과 몸을 추스르고 다시 일어서서 내 길을 가야 하는 건 전적으로 나에게 달려있겠지. 붙잡을 곳이 아무 데도 없다는 것은 퍽 쓸쓸하고 때로는 무척 무서운 일이라는 걸 왜 진작 몰랐을까 싶어. 아니라고? 수풀처럼 우거진 삶의 곳곳에서 여러 가지 신호로 내게 위험 경고등을 켜주었다고? 그래, 그랬을 거야. 내가 못 알아차렸을 뿐이지. 그렇게 못 알아차리고 살면서 나이를 먹고 철이 들어가나 보다.
언젠가 말이야. 여름밤이었어. 안방 침대 위에서 잠을 자다 깼는데 내 몸이 땀에 흠뻑 젖어있었어. 열대야가 기승을 부려 한밤중인데도 밖은 28도를 넘나들었으니 실내는 말할 것도 없이 푹푹 쪘지. 간신히 잠이 들었는데 더위에 잠을 깨 본 것도 그때가 처음이지 않을까 싶다. 거실로 나와서 홑이불도 깔지 않고 맨바닥에 살을 대고 누웠어. 배앓이를 할지도 모르니 얇은 여름 이불 하나 배 위에 덮고 잠이 들었지. 바닥의 한기가 올라와서 제법 시원했던지 금세 잠이 들더라고.
그리고 너를 만났어.
텔레비전이 켜졌어. 소리가 났지. 거실 등을 켜지 않고 텔레비전을 켠 것은 소리를 내려고 했던 거지? 소리를 내야 내가 잠에서 깰 수 있으니 말이야. 어두운 거실에서 텔레비전 빛이 사방으로 퍼졌어. 파란색이라고만 하면 설명이 어려운 짙은 푸른색, 푸르다 못해 검은빛이 도는 그런 색깔이 거실 안을 가득 채웠지. 나는 일어나서 텔레비전을 끄려고 했어. 텔레비전이 미친 것도 아닐 테고 한밤중에 저 혼자 켜지면 안 되는 거잖아. 텔레비전을 보지도 않을 건데 낭비되는 전기는 또 어쩌고.
그런데 몸을 못 일으켜 세우겠더라고. 일어나야 된다는 생각에 있는 힘껏 바닥에 손을 짚고 상체를 일으켜 세웠는데, 상체는 일으켜 세워지지 않고 내 시선만 공중에 떠 있는 거야. 공중에 떠서 바닥의 냉기를 흡수하겠다는 듯이 딱 붙어 잠들어 있는 내가 보였어. 그마저도 바닥에 살을 대고 누워 있는 나를 오래 보고 있을 수가 없더라고. 어지러워서, 너무 어지럽고 머리가 아파서 누워있는 내 몸으로 시선을 재빨리 다시 옮길 수밖에 없었어. 그러고 나니 공포가 비구름처럼 나를 덮치더라. 온몸이 그 비구름에서 쏟아낸 비에 젖어 덜덜 떨기 시작했지. 열대야로 밖은 28도를 넘나들고 있고, 에어컨을 켰어도 실내온도는 후텁지근했는데도 나는 추워서 견딜 수가 없었어. 본능적으로 몸을 옹송그려서 체온을 유지하려고 했지만 나는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 없었어.
그때 네가 두 손으로 내 어깨를 잡는 손길을 느꼈지. 분명히 네 손이었어. 내가 그때 러닝셔츠 바람으로 있었기 때문에 네 손길을 더욱 잘 느낄 수 있었어. 5초쯤이었지? 5초쯤 네가 내 어깨를 꼭 잡아주었어. 괜찮다고, 무서워하지 말라고, 이제 괜찮다고. 얼음을 손가락으로 잡으면 온도차로 인해 손가락 피부가 얼음에 살짝 붙어버리지. 얼음 같은 네 손가락이 내 어깨 살갗에 붙었다 떨어졌어. 어깨 부위가 얼얼해졌고, 아프기까지 했지만, 나는 알아차렸어. 이렇게까지 해서 내게 나타나려고 했던 건, 내가 간절히 너를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야. 내가 끌어당긴 거였어.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만나게 해달라고 했거든. 그러고 나서 영원히 보지 않아도 좋으니 내 눈앞에 한 번만 나타나 달라고 했거든. 1997년 3월 이후로 너를 한번도 본 적이 없었으니까. 20여 년이나 지났으니까, 이제는 내가 불쌍해서라도 한 번은 만나게 해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하나님께 물었지. 나는 너를 잃은 후로 사물의 분별이 가능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다녔던 교회도 가지 않았어. 하나님이 계시면 뭘 해, 소중한 것을 앗아가 버리는데. 그런데 그날, 그 뜨거운 여름밤에 네가 나타났어. 네 손길은 무척이나 서늘했고 차가웠지만, 나는 미소 지었어. 내 온몸을 감싸고 있는 더위를 물리쳐주기 위해서라는 듯, 나를 둘러싸고 있는 불안과 불확실성에서 나에게 잠시 위안을 주겠다는 듯. 생각해보니 그때가 내가 한국을 떠나 일본으로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결정해야 했던 외로운 시기였어. 뭐? 꿈보다 해몽이 좋다고? 그래, 그래도 좋아, 어찌 되었든 너를 만났으니 나는 그걸로 충분히 평온해졌어.
너를 불러보았지. 대답이 없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네 이름을 가끔 불러보곤 해.
힘들 때, 외로울 때, 방향을 잃었을 때, 겁이 날 때, 울고 싶을 때, 화가 났을 때, 침울할 때, 아플 때
그리고
행복하고, 기쁠 때도, 맛있는 것을 먹고, 멋진 풍경을 봤을 때도, 벅찬 가슴을 어쩌지 못할 때도
너를 생각해.
비문증처럼, 내 눈동자에서 검은 물체로 왔다가 사라져도 좋으니 앞으로도 가끔 내게로 와줘. 얼음처럼 차가운 네 손길을 5초만 견디면 되는 거잖아. 내가 서늘한 한기에 겁을 먹을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 정말 괜찮으니 삶에 큰 변곡점이 있을 때라도 한번쯤 잠시…… 내가 있는 곳에 머물다 가줘. ■